인생의 밑거름

2011.06.01 02:46

충남공주 조회 수:1450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윤리 선생님이 있었는데 전교에서 왕따였어요.

종이 쳐도 수업을 결코 끝내주지 않으셨거든요.

 

4교시 수업인 날이면 다들 문밖의 급식차를 바라보며 발만 동동..

그런데 워낙에 카리스마가 있으셔서 아무도 감히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죠.

 

저도 그때 전교생을 왕따시키던 아이라 일종의 동병상련인지

윤리시간마다 일부러 맨 앞자리로 바꾸면서까지 수업에 불을 살랐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유일하게 시험과 입시를 위한 암기가 아니라, 소통을 했던 수업이었던 것 같아요.

대학의 철학 강의만큼이나 알차서 매 시간이 코페르니쿠스 전환이었죠.

 

뭐 애들이 싫어해도 별로 개의치 않고 가르쳐야겠다 싶은 건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도 너네들 싫은데 내가 나랏돈을 받는 이상 안가르칠 수가 없다고.

대놓고 엎드려 잠을 자도 코만 안골면 돼요. (코만 골았다 치면 분필싸다구 날아갑니다)

 

애들 이름같은 건 거의 불러주신 적이 없었고, 다만 "야 너" 지목해서 뭘 물어보면 자다가 일어나서라도 대답 또이또이 해야하는데

변증술의 달인이셔서 내가 무슨 대답을 하는지 몰라도 결국 해답에 도달하게 되는게 엄청 신기했지요.

이거는 책상이 난지 내가 책상인지도 모르다가 꼭 딴소리 하는 애들이 있었는데, 그러면 칭호를 얻어요. "쟤가 진짜 소크라테스야"

다음시간부터 선생님은 그 친구를 소크라테스라고 부릅니다.

등짝을 뚜드러 깨워도 굴복하지 않는 꿋꿋한 청년은 에피쿠로스가 되었죠.

제 칭호는 그냥 반장이었습니다.

딴에는 이름 한번 불려보겠다고 나름의 복수심으로 열심히 듣는 사파들도 존재했지요.

  

어느날은

인생의 좋은 밑거름으로 두 가지가 있다면 자기는

"가난과 지知적 허영심"이라고 생각한대요.

전후 내용은 그대로 기억이 안나지만 그 두 단어가 팍 꽂혀서 이후 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딱 우리학년까지 가르치고 갑자기 교직을 놓으셨는데요, 그때 연세 오십이셨어요.

인생 절반을 생각하는 대로 달려왔으니 나머지 절반은 돌아보겠다며 퇴임식같은 것도 없이 홀연히 퇴장하셨죠.

우리한테는 농담삼아 이제는 택시운전 하실거라고.

 

나중에 졸업하면서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제일 먼저 연락 드리고 싶었던 은사님이 이분이었는데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졸업하고 처음으로 이름 불린 겁니다!

퇴임하고 책 내셨다면서 일부러 책도 보내주셨어요.

장르는 클래식 음악 에세이. 뜬금없죠.

 

요즘은 뭐하시려나. 조만간 찾아봬야지.

 

여러분이 생각하는 인생의 밑거름은 어떤 것이 있나요?

두가지씩만 꼽아봐요

 

음 저는 가난과 지적허영심 받고, 자존감과 열등감이요 

이문세 - 할말을 하지 못했죠

할말을 다 못하면 눈물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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