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은 많은데 도피중

2010.12.02 11:58

ginger 조회 수:2094

전쟁 위험이 어쩌고 하니 다른 나라의 지인들이 전화와 메신저로 안부를 묻습니다. 이사람들아, 대책 없고 신뢰가 안가는 말만 강경 우파 정부 때문에 좀 미심쩍긴 하지만 전쟁 위험은 매우 낮다네. 심심하거든 한국에 오시게. 여러 모로 스릴있게 살 수 있다네. 라고 하긴 했지만 스트레스가 올라오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입니다.



가끔 제가 몽크 아저씨와 비슷한 증상이 아닌가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살면서 점점 더 심해지는 듯. 웬만한 데는 덤덤해 졌는데 아직도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소음입니다. 하늘 공원에 가도, 통일 동산에 가도 나오는 스피커의 음악 때문에 괴로와요. 왜 조용히 산책도 할 수 없게 만듭니까. 돈 들여가면서 요기 조기 많이도 스피커를 설치했더군요. 또 하나는 껌 씹는 소리. 어딜가나 피할 수 없는 껌 씹는 소리 특히 버스나 지하철에서 가까운 자리에서 리드미컬하게 짝짝 소리내서 씹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다가 나중엔 천둥 소리처럼 머리를 두들길 지경이니 이정도면 병입니다. 병. 내렸다 타거나 다른 칸으로 가거나. 그런데 어디나 복병은 있거든요. 그래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귀마개나 이어폰은 필수입니다.




카페에 앉아 있는데 창밖에 본인들은 상당히 불량스럽다고 생각할 중학생 쯤 되어보이는 남자애들이 앙상한 다리에 스키니 바지처럼 줄여 입은 교복 바지에 끔찍한 색깔로 염색하고 제법 멋내서 깎은 머리를 한껏 세우고 모여 서서 경쟁적으로 1초 간격으로 침을 밷고 있더군요. 조금 있으면 웅덩이가 생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요. 처음엔 침 밷는 행위 때문에 역겨워서 고개를 돌리다가 으쓱대면서 한껏 불량해 보이라고 애를 쓰며 수컷 영역 표시 흉내를 내는 애들이 우습기도 하고 재밌어서 관찰 좀 했습니다. 짤막하고 앙상한 휜다리는 어처구니 없이 짝붙는 스키니 덕에 더 도드라지고 양쪽을 밀고 뒷머리는 기른 머리 모양 덕에 여드름 가득한 앳되고 덜 여문 얼굴의 결점이 훤히 드러납니다. 몇 년 후에 자기들도 생각해보면 창피하지 않을까 싶네요. 얘들아, 멋을 내려면 결점은 최대한 가리고 장점을 살려야지. 돈 주고 저렇게 흉하게 하고 다니라고 해도 절대 안할텐데.  하긴 치매 할머니도 아닌데 계속 길거리에서 침을 줄줄 흘려대는 그 소년들의 멋에 대한 견해는 저와는 다르겠죠. 저 침을 밷는 사이 사이 나오는 말이 뭔지는 입모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  




어쩌다가 귀대하는 듯한 군인들을 보게됐습니다. 아니 저렇게 앳되고 어려보이는 얼굴이라니. 본인들은 늠름한 남자라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전 그냥 짠했어요. (네, 저 늙었어요.) 그냥 한 개인으로 살던 사람들이 사회/국가에서 요구하는 역할 속에 정체가 형성이 되어 가네요. 부디 안 다치고 무사히.




연애와 이별에 느끼는 감정들은 다 진짜긴 한데요, 죽을만큼 아프다는 유행가 가사 내지는 저사람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대사 (신데렐라 언니에서 근봉양이 연기한 좀 덜 떨어진 은조양의 읊조림)를 들으면 "그럴 것 같죠? 안 죽어요." 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뿐아니라 몇 번 반복하다보면 그런 아픔을 다루는 기술도 늡니다. 외로움을 다루는 기술도 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 아는 분이 '난 연애가 끝나면 사람이 너덜너덜해져서 나오는 것 같아"라고 했었죠. 그 말을 했을 때 그 분이 30대 중반에 이혼 일보 직전이었는데, 그렇게 될 걸 알면서도 또 연애하고 끝나기를 반복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짝을 찾고 있죠. 그냥 그게 그사람 스타일.




부당거래도 봤고 이층의 악당도 봤습니다. 아저씨도 봤네요. 아저씨는 신파만 나오면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괴로왔고 심한 폭력 장면은 눈을 감아서 잘 못봤습니다. 애들이 심한 고통 속에 던져지는데 긴박하질 않으니 김이 좀 샜어요. 엔딩은 불필요해보였습니다. 아저씨도 그렇고 의형제도 그렇고, 주인공들을 차마 못죽이네요. 둘 다 죽어야 더 말도 되고 극의 완성도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데. 부당거래도 잘 나가다 나중에 갑자기 셰익스피어 비극 삘로 가서 당황. 신파 땜에 오글오글. 영화를 한 30분 잘랐으면 했습니다. 제 취향에 제일 맞는 영화는 이층의 악당이었습니다. 쿡쿡 웃으면서 봤고 보고 나와서도 즐거웠어요. 사춘기 외모 컴플렉스 소녀로 나온 지우는 예쁘기만 하더군요. 집이 마음에 들어서 그 집이 있는 동네가 어딘지 궁금했어요. 



햄릿도 상당히 막장이라면 막장 설정이죠. 주말 연속극 재벌가 막장 가족극으로 해도 뭐. 아빠가 수상쩍게 죽자마자 엄마가 삼촌이랑 재혼했는데 아무리 봐도 엄마랑 삼촌은 애저녁에 바람이 난 것 같고 삼촌이 아빠를 죽이고 마누라며 회장님자리며 죄다 꿰찬 것 같은데 이게 증거도 없고 어찌 복수를 할꼬? 여자친구는 삼촌 심복 딸이고, 우리 엄마 드럽다, 에이 씨. 그 여자가 낳은 나는 뭐냐. 여자는 드럽다. 그러니까 오필리어에게 분풀이 하면서 "수녀원에 가라. 뭐하러 나같은 죄인을 낳으려구 하냐?"고 지롤지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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