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머지 않은 곳에 서양인들을 타겟으로 한 식당과 술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거리가 있습니다. 멕시칸 식당이라던가, 브라질식 바베큐라든가, 미국식 카페라든가, 24시간 미식축구, 크리켓, 농구, 럭비등이 중계되고 있는 스포츠바라든가요. 요즘은 중국인들도 꽤 많이 보입니다만, 대개는 백인들이 주 고객이었지요.


작년 중순쯤 그 거리의 한 복판에 작고 허름한 식당이 하나 생겼어요. 주변의 화려한 식당들과는 달리 아무런 내부 장식도 하지 않았고, 종업원들도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죠. 중국이라기보다는 어설픈 유럽 도시같은 느낌을 주고, 중국인보다 백인들이 더 많이 보이는 그 거리에선 참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식당에 들러서 맛을 한 번 보고는 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메뉴가 밥에다 이것저것 간단한 고기나 반찬류를 얹은 일품요리나 반찬, 그리고 국이었어요. 간단한 음식들을 팔았지만, 정말 집에서 한 음식들처럼 깔끔하면서도 정감이 있었어요. 게다가 두세가지 메뉴를 섞어 먹어도 한국돈으로 3-5000원 정도면 거뜬할 정도로 저렴했구요. 같이 갔던 친구에 따르면 대만식 가정요리라고 하더군요. 언어문제로 종업원들과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었지만, 무례하고 손님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기 일쑤인 일반적인 중국 음식점들에 비해서 종업원들의 서비스도 좋았습니다. 동네 밥집에 들르는 푸근한 느낌에 그 집은 제 단골이 되었지요.


출장의 계절이 다가와 몇 달 동안 그 식당에 들르지 못하다가 주말을 맞아 점심을 먹으러 갔어요. 거기서 우육탕면을 먹어본 기억이 없는데, 지나가던 길에 그 집 앞에 대만식 우육탕면이라는 간판이 크게 걸려있는 걸 봤거든요. 그런데 느낌이 좀 이상했습니다. 허름하기 짝이 없었던 식당의 테이블들에 황금색 천들이 울긋불긋 깔려있고, 삼십년은 묵은 듯한 컵대신 커다란 유리 머그로 차를 내왔더군요. 늘 수줍게 미소를 지어서 기억에 남은 종업원 아가씨도 왠지 어울리지 않은 파란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느낌이 이상했지만 크게 의심을 품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한페이지 달랑이던 메뉴 대신, 일반적인 중국집처럼 두꺼운 메뉴책을 내어오더군요.


메뉴에는 온갖 화려한 이름의 요리들이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일식도 아니요, 중국식도 아니요 대만식도 아닌 듯한 정체불명의 요리들. 제가 즐겨 찾고 익숙하던 가정식 요리는 메뉴의 맨 끝에 장식처럼 붙어 있더군요. 그런데 종전보다 가격을 다섯배 정도는 올려서 적어놓았어요. 우육탕면 한그릇이 한국돈 18000원이라네요. 비록 점심 셋트메뉴라는 이름으로 샐러드와 식후 음료가 포함된다는 설명이 붙어 있긴 했지만 이쯤 되니 기도 차지 않더군요. 아니 우육탕면 먹으러 온 사람이 샐러드를 찾을거라고 생각한 이유가 뭡니까?


뜨억한 표정으로 메뉴에서 고개를 들어 종업원을 쳐다보았더니 왠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제 눈길을 회피합니다. 사실 이 식당이 장사가 잘되는 편은 아니었어요. 백인들이 주로 우글거리는 거리에서 싸구려 대만 가정식이 인기가 있을리가 없지요. 더구나 중국 식재료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뚫고 화성까지 솟아오른 요즘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번쩍번쩍 화려하지만 촌스러운 비단으로 식당 내부를 치장하고, 종업원의 유니폼을 비단옷으로 바꿔준 후에 동네의 다른 웨스턴 식당들이 청구하는 가격을 적어놓는다고 갑자기 저렴한 가격의 밥집이 미쉘린 투스타 레스토랑으로 바뀌는건 아니잖아요. 종업원들이라고 그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조용히 메뉴를 내려놓고, 종업원에게 너무 비싸요 한마디만 남겨놓고 식당을 나섰습니다. 좋아하던 식당을 이런식으로 잃게되다니, 식당주인에게 너무너무 화가 났어요. 이 식당 자체도 몇 달 버티지 못하고 사라질테구요. 가카스런 꼼수를 쓰는 식당주인같으니...... 아, 이제 대만식 돼지커틀릿 덥판은 어디가서 먹는단 말인가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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