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가 도착했을 땐 김창완 밴드의 무대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 치곤' 이라는 말이 안 나오게 그냥 잘 하시더군요.

내 마음에 주단도 막 깔고 아주 신났지만 동행한 친구가 검정 치마 무대를 보러 가자길래 순순히 따랐습니다.

'근데 김창완은 연기도 잘 하잖아.'

'맞아. 특히 나쁜놈. 알고 보면 진짜 나쁜 놈일 것 같아 ㅋㅋ'

이런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창완옹을 등졌죠. 죄송합니다 창완 아저씨. ㅠㅜ


2.

검정 치마의 무대가 시작되기 20분쯤 전에 무대 앞에 도착했지요.

'의외로 사람이 없다?' 면서 좋은 자리 잡고 즐거워하는데 무대에 검정 치마 멤버들이 직접 나와서 사운드 체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 학교에서 선생질을 하고 있는 친구가 '진짜 흔한 존재감 없는 타잎ㅋㅋㅋ' 이라는 드립을 치고 있는데 사방의 여성 관객들이 '존잘!', '귀여워!!', '너무 잘 생겼다!'라고 외치는 걸 듣고 둘이 사이 좋게 침묵했습니다. 죄송해요 여성팬분들. 하지만 '역시 사람은 노래를 잘 하면!' 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


밴드 이름만 많이 들어봤지 제대로 들어 본 곡이 얼마 없어서 무대에 대해 자세한 얘긴 못 하겠구요.

그냥 참 잘 하더군요(...)

보컬이 참 안정적이고 목소리도 좋고. 곡들도 딱히 빠지는 곡 없이 다 좋았습니다.

멘트는 거의 없이 ('안녕하십니까 지산!' 이라든가 '달려볼까요?'라든가 하는 콘서트 고정 레파토리 몇 마디만;) 스트레이트로 40분을 꾸몄는데... 반복이지만 참 잘 하더라구요.

그 와중에 친구의 '저 기타 완전 직장인 밴드 포스 아니냐?' 라는 발언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실력이 아니라 인상이...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군요.

검정 치마와 검정 치마 팬분들에게 사과드립니다. (_ _);


하지만 보컬분의 검정 바지가 계속 신경 쓰였다는 얘긴 꼭 하고 싶어요.

검정 치마라서 검정 바지를 입은 건가요? 그렇담 왜 치마를 입지 않(그만해!!!;)


3.

검정 치마의 무대가 끝나자마자 엘비스 코스텔로 무대로 향했습니다.

엘비스옹의 무대도 보고 싶었지만 이 무대가 끝나고 그 자리에서 라디오헤드의 무대가 있어서 미리 자리를 잡아 두려고... (죄송합니다 엘비스옹 ㅠㅜ)

근데 무대가 참 기대 이상으로 좋았어요. 앞서 김창완옹 이야기도 했었지만 이 분도 훌륭하시더라구요.

특히 오늘 봤던 무대들 중 가장 '전형적인 밴드 무대' 연출이 많아서 더 맘에 들었습니다.

왜 이런 거 있잖아요. 보컬이 '기타~!!!!' 라고 외치면 기타리스트가 자가자자자장 솔로 연주하고 관객들 박수 치고. 다음엔 보컬이 '드럼~!!!!' 하고 외치면... 같은 거요.

파릇파릇 젊은 검정 치마나 이미 일반적인 '락밴드' 이미지와는 한참 멀어진 라디오헤드 무대에 비해 꽤 전통적인 느낌이었고. 그래서 좋았습니다.

방방 뛰며 기타 치고 노래하고 관객들 호응까지 유도하며 틈틈이 물도 열심히 마시는 엘비스옹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구요.

'peace, love & understanding'이 나올 땐 열심히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뭐 그랬구요.


4.

엘비스 코스텔로의 무대가 끝난 후 라디오헤드 공연이 시작되기까지의 시간이 한 시간 십분. 그냥 서서 버텼죠;

사람들은 계속 계속 계속 꾸역 꾸역 꾸역 몰려들었지만 처음 잡은 자리가 꽤 맘에 들어서 그냥 거기서 버텼습니다.

나중엔 사람이 너무 많아지니 안쪽에서 밀리고 쏠리다가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 명이 나오면 그걸 보고 다섯 명 정도가 쑤셔 들어가더군요.

분명 산수가 맞지 않는데도 그게 되더라구요. 공연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런 식이었으니 맨 앞 근처 가장 좋은 자리 잡고 계시던 분들은 체력적으로 많이 힘드셨을 듯;


암튼 공연 시간보다 5분 정도 일찍 시작해서 한 시간 반 꽉꽉 채우고 앵콜로 40분을 더 했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그냥 콘서트 수준이라 우길 수 있으니 이 공연만으로도 거의 본전 뽑았죠. 또 애초에 6년만에 친구와 락 페스티발을 찾은 목적이 이 팀이었으니만큼 더더욱 만족스런 볼륨이었습니다.


요즘 이 팀이 들려주는 음악의 특성상 뭔가 장비가 되게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을 조니 그린우드(제 친구는 머리 모양 때문에 계속 '홍명보'라고 불렀던;)가 혼자 다 처리하더군요. 노래 바뀔 때마다 기타 치다가 키보드 두드리다가 갑자기 요상한 장비를 들고 FM을 수신하질 않나. 공연의 주인공은 탐욕(...)형님이었지만 흑막은 저 녀석이라고 친구는 단정지었습니다. 정말 별 걸 다 하더라구요; 그리고 그 많은 장비들 중 유난히 밝게 빛나던 사과 모양을 보고 역시 남자는 맥이라는 시덥잖은 농담도;


뭐 다들 예상했던 대로 예전 노래는 보너스로 몇 곡 섞여 있었고 대부분 요즘 곡들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궁금증이 생기더군요.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다 20대 분들이고 제 또래는 오히려 찾기가 힘들었는데. (이건 자리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저 파릇파릇한 분들은 이 노땅들처럼 '오케이 컴퓨터' 시절 근방 음악들을 좋아하는 건지 아님 '키드 에이' 이후의 음악들을 좋아하는 건지. 그러다 'Exit Music'이 울려 퍼졌을 때 깨달았습니다. 아. 역시 덕후들의 마음은 모두 같구나(...) 그 전까지도 열광적인 반응이었지만 이 곡이 흘러 나오니 완전히 뒤집어 지더라구요. 떼창에 묻혀서 탐욕씨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막. ㅋㅋㅋ


오케이 컴퓨터 앨범 수록곡은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졸려서 기억이;) '카르마 폴리스', '엑시트 뮤직', 그리고 앵콜의 앵콜의 앵콜 중 마지막 곡이었던 '패러노이드 안드로이드'를 연주했습니다. 앵콜을 끝낼 듯 말 듯 오락가락했지만 친구와 저는 예습의 결과로 결국 '패러노이드 안드로이드'가 나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긴장하지 않고 쭉 기다렸죠. 결국 그게 또 마지막 곡이었고 친구와 저는 삶의 보람(?)을 찾고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엑시트 뮤직'도 불렀잖아요. 그건 정말 부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사실 전 그 노랜 크게 좋아하지 않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듣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못 해 막 벅차 오르더라구요. ^^;


사실 90년대엔 라디오헤드를 좋아하긴 했어도 팬까진 아니었습니다. 일단 사방팔방에 울려 퍼지고 오만 아마추어 밴드가 죽어라고 커버해댄 '크립'의 식상함이 커서 제 성격상 마구 좋아하긴 힘들었어요(...) 그 와중에도 '에어백' 이나 '노 서프라이지즈' 같은 노랜 좋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크립'의 지겨움이 너무 강해서;

그런데 뭐랄까. 옛날 옛적 전설의 그 아저씨들이 진짜 제 눈 앞에 와서 연주를 하고 있으니 갑자기 없던 정, 추억, 감회가 막 솟구쳐오르더군요. 물론 그 시절에 생각했던 라이브 공연에 웃통 벗고 오징어 춤을 추는 보컬님의 모습은 없었습니다만. -_-; (공연 내내 거의 댄싱 모드더군요. 체력도 좋아요 탐욕씨;)

일생에 이 분들 공연을 볼 기회가 처음으로 왔고 또 다음 기회가 있을지 없을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공연이 끝나고 출구를 향하는데 뭐랄까. 일생의 숙제 하나를 끝낸 것 같은 후련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감동적이었구요.


+ 요즘 탐욕씨 보컬 스타일이 라이브로 제대로 들리기 힘든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안 그랬구요. 연주 자체도 훌륭했지만 사운드가 정말 좋았습니다. 오늘(이 아니라 어제;) 본 공연들 중 사운드가 나쁜 공연은 없었는데도 라디오헤드 공연은 거의 군계일학이란 느낌이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장비(=돈)이 문제인 건지 기술의 문제인 건지 아님 둘 다인지.


++ 대형 스크린을 활용하는 방식이 인상적이고 멋졌습니다. 무대 곳곳에 소형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무대 왼쪽 여섯개, 오른쪽 여섯개, 중앙에 n개(기억이;) 화면에다 각각 카메라에 잡히는 모습을 띄워주는데 카메라 구도도 그렇고 색감도 그렇고 아주 멋지더라구요. 곡 리듬에 맞춰 깜빡거리고 또 분위기에 따라 미리 설정된 효과들을 섞어 주는데 그것도 다 적절. 무대가 직접 안 보일 때는 물론이고 잘 보일 때도 일부러 그 쪽을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 도대체 그 알량한 휴대폰 카메라로 뭘 찍겠다고 그렇게 공연 내내 팔을 치켜 들고 녹화하며 시야를 가리는 걸까요. 일생에 다시 없을 경험이니 남기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결국 민폐잖아요. 한 번 녹화하고 마는 것도 아니고 곡 시작할 때 녹화하다가 팔 아프면 중간에 끊고, 다음 곡 녹화하다 또 끊고. 결국 참다 참다 못 해 공연 중반에 빽!하고 소리를 질러 버렸습니다. '아 진짜 그노무 동영상 작작 좀 찍어요!!!'

 근데 사람들이 참 착하시더라구요. 그 시끄러운 와중에 제 목소릴 듣고 핸드폰을 좌라락 내려주셔서 그 후로 공연 끝날 때까지 보복의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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