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머나먼

 

                             - 진은영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 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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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으면서 저는 듀게 생각이 났어요. 듀게가 좋았던 것은, 듀게가 멀리 있으니까.

직접 오프라인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들고 꺼려지던 시기에, 하지만 동시에 사람의 온기가 참 많이 그리웠던 시기에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비슷한 취향과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서 듀게가 좋았어요.

필요할 때는 접속하고, 마음 내키면 글도 쓰고 댓글도 달고, 또 언제든 로그아웃하고 모른 채도 할 수 있고.

게다가 내가 누군지 모르니까(요샌 신상털기가 좀 무섭긴 하지만;;) 가끔은 누구에게도 못했던 말도 꺼내놓을 수 있고.

하지만 오프라인에서의 삶이 바빠지면서 듀게도 뜸하게 되더라구요.

그래도 자주 들리긴 했지만;; 주로 눈팅만 하게 되구요.

 

저는 다른 데는 가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없어요. 아, 가끔 웃긴 영상들을 찾아 연예게시판들을 돌아다니는 군요;;

그치만 거기서는 딱히 활동이랄 것이 없으니까..

듀게는 참 신기루 같은 곳입니다. 뭐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것도 같고.

듀게에는 오랜된 회원분들도 많아서 저처럼 몇 년 안 된 사람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우습지만요.

여튼 전 듀게를 좋아합니다. 신기루 속에서 가끔 진짜 마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해서요.

그게 설령 그냥 신기루일 뿐이라고 해도, 그걸 본 순간에 조금 더 사막을 건너갈 힘이 생기곤 했다는 건 사실이거든요.

 

언제부터인가 한국사회가 '분노'사회가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놀랍지 않게 되었죠.

자꾸 말이 뾰족해지는 것도 이미 우리에게 쌓인 스트레스와 화가 많아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특히 더 나은 세상, 더 올바른 삶을 꿈꾸는 사람일수록 지금의 현실로부터 받는 압박이 엄청나겠죠.

뭐 대단한 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냥 '상식'(이 뭔진 몰라도) 수준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현시창인 건 마찬가지일테구요.

특별히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해도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들이 이미 임계치를 넘어선 경우들도 많겠구요.

분노는 중요하죠.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에너지 중 하나잖아요.

다만 마치 불을 다루듯, 분노도 잘, 현명하게 다루어야 할텐데, 크기가 커질수록 다루기도 쉽지 않아지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분노를 다루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 중 하나는

지금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우선하는가, 아니면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혹은 간절히 바라는 다른 것이 있는가 를 생각해보는 겁니다.

내가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무언가에 오히려 해가 된다면, 그럴 땐 잠깐이나마 분노를 뒤로 미뤄둘 수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따로 풀어야죠;; 요샌 주로 혼자 있을 때 욕을 합니다;;; 지난 번에 듀게에도 올라왔던 대리운전 상담원분 음성 듣고 감화를 받아서^^;;;

 

그 대리운전 음성에서처럼 진상고객을 상대할 때는 시원하게 맞욕(!) 해주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닌 그냥 논쟁과 토론에서는 상대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조금씩 더 너그러워진다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 어떤 유저분이 무언가 잘못을 하셨는데 굉장히 정중하게 사과하시고 잠시 쉬시다가 돌아오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렇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멋지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의견을 주고 받고, 내가 잘못한 점이 있을 때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또 누군가가 사과할 때에는 그것을 받아주고

그래서 구성원들끼리 척을 지거나 누군가가 집단 밖으로 튕겨져 나가지 않는 것이 이상적인 공동체겠지요.

그냥 일개 온라인 커뮤니티일 뿐인 곳에서 이상적인 공동체까지 들먹이며 이야기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꼭 듀게만을 지칭해서 하는 얘기는 아니고, 제 오프라인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도 그런 부분들이 아쉬웠던 기억이 많아서 적어보았습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요...

 

 

 

쓰고 보니 새해 올리는 첫 글이네요!

듀게 회원분들, 눈팅만 하시는 분들, 가입통과를 기다리고 계신 분들과 마음 아프게도 탈퇴하신 분들

모두모두 2013년 한 해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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