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가바를 두려워하랴

2010.06.15 22:56

차가운 달 조회 수:4253



버스에서 내려 잠시 생각했죠.

정류장 앞에는 동네 슈퍼가 아직도 불을 밝히고 있었어요.

하루 종일 소나기가 오락가락했지만 여전히 무더운 밤,

시원한 하드나 먹으며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죠.

하지만 이건 누구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에요.


누가바, 누가바,

얼마 전 누가바를 먹다가 절반이 뭉텅 떨어져나간 적이 있었거든요.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어요.

누가 내 누가바를 책임질 것인가?

휘적휘적 팔을 휘저은 내가 잘못인가.

말랑말랑 다 녹아가는 누가바를 판 동네 슈퍼의 잘못인가.

애초에 누가바를 이따위로 만든 하드 공장의 잘못인가.


이건 트라우마예요.

하드, 하드, 시원한 하드를 먹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누가바라면?

전 정말 두려웠어요.

다시 누가바를 샀다가 또 절반이 떨어져나간다면, 아니, 이번에는 막대에서 완전히 빠져버린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정말 두려운 일이죠.

세상에는 얼마든지 많은 하드가 있는데...

비비빅, 쿠앤크, 보석바, 메로나, 엔쵸, 메가톤바, 바밤바, 서주 아이스주, 깐도리...

하지만 나는 왜 누가바가 아니면 안되는가.


지금 이 벽을 넘지 못하면 그 벽은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것이다, 그 다음 벽도 넘지 못할 것이다.

저는 누가바를 먹어야만 했어요.

누가바를 먹을 수밖에 없었어요.

공장에서 마구 찍혀 나오는 누가바, 동네 슈퍼의 냉장고에 잔뜩 쌓여 있는 누가바, 

내 앞에 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누가바,

이 누가바를 넘지 못하면 나는 영영 그 어떤 하드도 먹지 못할 것이다.

그래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걸어들어갔죠, 동네 슈퍼로.

냉장고 문을 열고 오른쪽 벽에 얌전히 쌓여 있는 누가바를 집었어요.

잔돈이 없어서 만 원짜리를 건넸어요.

꾸깃꾸깃 거스름돈을 받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어요.

누가바색 누가바의 포장을 쭉 찢어 벗기고,

거침없이 한 입 물었죠.

단단하더라구요.

이건 떨어져 나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오렌지색 보안등 불빛이 켜져 있는 골목을 걸었어요, 누가바를 입에 물고.

시원했죠.

내 안에 쌓여만 가던 어떤 두려움이 서서히 녹아들고 있었어요.

내가 걷는 길 위로,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저 푸른 밤하늘 위로.

모든 두려움을 떨치고 유유히 걸었어요.


이젠 알아요.

이젠 그 어떤 누가바도 두려워하지 않을 거예요.


누가바가 오면 누가바를 먹고,

엔초가 오면 엔초를 먹고,

메가톤바가 오면 메가톤바를 먹고,


메로나, 메로나,

아마도 해탈은 이런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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