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결과 발표 그리고 멘붕기

2012.12.21 02:21

정마으문 조회 수:1336

1.자주 얘기를 꺼냈지만 듀게에서는 듣보무명인지라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이집트 카이로의 공기업에서 5개월째 인턴을 하고 있고(왜 카이로냐면 전공과 관련이 있습니다), 문재인 의원 옆 학교 소속이며  내년 2학기를 마치고 졸업할 학생입니다.

 

선거권 생긴 2007년 대선 이래로 단 한번도 새누리당이나 그쪽 계열에 표를 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대의 현장에 딱히 참여한 것도 아니고, 그냥 현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정도?

 

뭐 저 역시 엄청나게 멘붕했습니다. 카이로 시차가 한국-7 이니 새벽 4시, 그러니까 한국시간 오전 11시 투표율까지 보고 와 많이 나온다!! 하고 설레면서 잠들었으니까요.

 

19일 저녁에는 술을 마셨습니다. 그냥 멍-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열혈 지지자여서 저랑 한번 언쟁하기도 했던 아부지한테 '소망 이루셔서 축하드려요'라고 카톡도 보내드리고, '기분 좋으실텐데 생활비 좀 더 넣어주세요'라고 농까지 했었죠. 일찍 잤다가 새벽 2시에 일어났는데 도저히 잠이 안 오더군요. 담배 여러대 피면서 절친 2명과 함께 카톡으로 한창 대화를 나눴습니다. 카이로 생활은 단조롭고 룸메이트도 그닥 공통의 주제가 많은 친구는 아니여서 열심히 얘기하다 보니 좀 기분이 나아지더라고요.

 

이왕 일찍 일어난거, 회사가서 일 좀 일찍 끝내려고 회사에 7시까지 갔습니다. 근데 이 거지같은 기분은 나아지질 않는군요. 지금도요.

 

2.제가 대선 결과 발표 이후 제일 충격받았던건 페이스북 친구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몇몇이 박의 당선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한 글을 올리더라고요. 그 친구들을 다 뉴스피드에서 안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때의 기분은 매트릭스에서 빨간 알약을 먹은 것 같더라고요. 저는 저랑 정치관이 다른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치 얘기는 맞는 사람 아니면 절대 안 하려고 하고, 잘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제게 박근혜는 물론 그 체질화된 비민주주의적인 본능, 독재를 반성하지 않는 태도, 말을 수없이 바꾸면서 약속은 지킨다고 하는 가증스러운 이미지 메이킹, 문제 많은 주변 측근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제일 싫었던건 최근 3번의 TV토론에서 보여준 무식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렇게 당선을 기뻐한단 말야?? 라는 생각이 드니까... 너무 보기 싫었어요.

 

지금은 심지어 페이스북 오른쪽 사이드바에 누군가가 박근혜 페이지나 글에 '좋아요' 누르는 사람 알게 되는 것도 괴롭습니다. 박근혜 지지하는 대학교 절친과 선거 전에 서로 지지하는 후보 당선되면 축하해주자, 그랬는데 축하는 했지만 그날은 기분 안 좋다고 말 안한다 그랬고, 오늘 말 거는데 왠지 깝죽거릴 것 같아서 예민하게 굴었더니 욕을 하더라고요(그 친구도 신상에 좀 힘든 일이 있긴 합니다). 꺼지라고 하고 메세지 창을 닫았는데 곧 사과하긴 했지만 정치가 뭐길래 이렇게 친구한테 모질게 굴게 되나... 싶더라고요.

 

3.앙드레 말로인가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이런 말을 남겼죠. "정의가 패배할 수 있음을, 폭력이 정신을 꺾을 수 있음을, 용기가 보답 받지 못 할 수 있음을 스페인 내전에서 배웠다."라고요. 딱 그런 느낌입니다.

 

일단 공정한 선거였다고는 죽어도 인정 못합니다. 언론과 방송은 철저히 새누리당 공보기관이었고, 선관위도 박에게 유리한 TV토론 룰을 만들고 불리한 환경, 언론 주제를 뺐고, 정부는 새누리당과 철저하게 공조했으며, 댓글 알바단 같은 온갖 불법선거가 난무했죠. 거기다가 새누리당은 이회창, 이인제, 최연희 같은 정치 폐물들을 다 그러모았고 캠프 인사들은 시작도 전에 비리에 절어 있었으며 선거 전략은 오직 네거티브, 노무현 대통령 모독, 색깔론이었죠. 민주당이 잘 했다고 생각은 안 합니다. 그래도 일단 야권은 물론이고 정치인 중에서도 최고의 후보를 내놓았고, 최소한 4월 총선같은 삽질은 안 했고, 어쨌든 야권 전체를 아우르는 단일화를 했고, 민주당을 지원하는 외곽 인사들까지 총동원 되었으니까요. 충분히 잘 싸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다니, 철저하게 모욕을 당한 느낌입니다. 게다가 역대 대선 당선자보다도 많은 1400만 몇 표를 받아서 졌다니까 다른 탓도 못해서 더 화납니다. 거기다가 더 짖궃게도 박근혜 득표율은 5.16%, 마치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우리나라를 철저히 엿먹이기로 작정한 것 같아요.

 

4.박근혜와 그 일당들, 그리고 국회 과반 새누리당이 해나갈 일들도 끔찍하지만, 무엇보다 우려스러운건 사회 분위기입니다. 트위터에서 동대구 재래시장 상인들이 박근혜 되니까 기뻐했다고 하니까 이제 재래시장 다 망하게 대형마트만 가겠다는 사람들, 농어민 박근혜 지지가 과반이 넘은 직업군이 농어민이라니까 한국 농어물 안 먹겠다는 말, 듀게에서 봤지만 65세 이상 지하철 요금 폐지하자는 말, 새누리당 강세 지역에서 뭔 일이 일어나도 동정하지 않겠다는 말 등등 보면 우려스럽습니다. 2030세대의 5060세대에 대한 적개심도 최고조에 이를 것 같고요. 솔직히 저도 아직은 그런 심정입니다만... 무엇보다 그 이후 다짐한게 있습니다. 제 룸메 친구인데, 알렉스 닮아서 멀끔하게 생기고 착한 성격인데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같은걸 보면 일베충(...)으로 짐작되는 친구가 있습니다. 부산의 학교를 다니는 친구인데, 역시 대선 결과 축하 글을 올리더라고요(여자친구랑 같이 사는데 그 여자친구도 역시). 내년에 사회 진출할때 반드시 성공해서, 그 친구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겠다고요. 저도 그런 적개감의 일부가 되는 것 같은데 일단 동기는 안 좋으나 2013년은 그 동기를 연료로 열심히 하려고요.

 

2013년엔 어짜피 취업 준비해야 하니 적당히 다른 것들에 대한 관심을 돌려야 할 것 같고, 그래서 누가 되든 2013년에 정치에는 관심을 좀 덜 기울이려고 했는데 다행히도 그렇게 되네요. 이거 하나는 확실해 졌습니다: 사회 첫 발을 내딛는 해에 박근혜가 당선되었으니 이를 악물고 살아야 겠다고요!

 

5.그 외 선거 결과... 홍준표 당선이야 뭐 이상하지도 않습니다. 야권이 총 결집해 무소속으로 나온 김두관이 고작 53%로 승리했는데 대선 출마한다고 사퇴했으니 오히려 70%대가 아닌게 더 놀라운 걸요? 사실 새누리당 중추가 홍준표 정도만 되도(심지어 홍준표가 대선 후보였다면!) 새누리당을 이렇게 싫어하진 않을텐데요. 홍준표가 첫 유세때 "권영길 후보는 17살 연상이여서 국회에서 형님 형님 했는데 이렇게 대결하게 될 지 몰랐다"고 일성을 할 때부터 저는 이미 결과를 확신했습니다. 물론 경비원 막말이 있었지만,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약자에 대한 연민이 쩌는 나라였습니까?

 

문용린 후보의 56% 득표 역시 마찬가지. 동성애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내고, 학생인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거리낌없이 얘기하는 후보, 박 캠프에 참가했던 후보, 후보 캠프 관계자가 상대 후보 사퇴 협박을 하는 후보, 지지단체들이 선거법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지지선언을 하는 후보가 당선되었다는게 참 그렇더군요. 무엇보다 친노, 종북처럼 전교조도(물론 문제가 없지 않다는건 압니다) 같은 낙인이 씌워진 것 같아서요. 지난 총선때 세종시 교육감도 유력했던 전교조 후보가 패했었죠.

 

서울 시민들의 선택에 대한 결과는 여기 프레시안 기사: 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1220015906&section=03 에서 보시고요.

 

저는 경기도민이고, 공교육은 벗어났으며, 자폐증이 있는 동생은 공교육 자장 아래 없기 때문에 자식들을 교육으로 힘들게 하고 싶다는 서울 시민들의 선택을 존중합니다ㅎㅎ 뭐 제가 아이 생길때쯤엔 아마도 좀 더 좋은 세상이 될 수도 있고, 아니라 해도 저는 다르게 교육하렵니다.

 

6.그리고 호남 주민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패권적 지역주의? 저항적 지역주의? 이런건 없어요. 지역주의는 지역주의일 뿐이고, 호남의 지역주의도 문제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호남 주민들은 냉정하게 판단하고 철저하게 지역을 무시한 정권과 그 후계자를 표로 응징했다고 봅니다.

 

일단 이명박,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5년 연속 불참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인가요? 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 연주를 금지하려고 시도했죠. 교육과정개편위원회는 5.18을 교과서 기술지침에서 빼려고 시도했고, 전주로 옮기려고 했던 LH공사를 진주로 갔으며, 해외에 한국을 홍보하는 무슨 기관장에 5.18은 공산폭동이라고 한 정신병자를 앉혔고, 실제 그렇게 썼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최근, 정기 군 인사에서 호남 출신들을 아예 진급시키지 않았죠.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묘역에는 전두환이 세운 비를 부숴서 바닥에 깔아놨다죠? 참배객이 오면서 밟으라고. 그런 전두환한테 박근혜는 현재 물가로 150억에 달하는 돈을 '황망히' 받았다고 얘기하면서 '돌려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퉁쳤고, 한화갑, 한광옥, 김경재 같은 정치 폐물들을 불러와서, 노골적인 지역주의 발언으로 표를 얻으려고 했는데 아메바도 그건 능멸로 받아들일겁니다. 그리고  4월 총선때 5.18을 역시 부정한 인사를 그것도 텃밭 강남에 공천하려고 했고, 캠프에는 역시 5.18을 부정한 인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데 호남에서 86~91% 득표율이 나온걸 지역주의로 비판하는건 강간 피해자한테 가해자랑 합의하라고 강요하는거나 다름없다고 봅니다. 이런 선택을 하면 지역주의라고 욕 먹을거고, 민주당은 표 빨아먹는 빨대로밖에 여기지 않겠지만 그걸 감수한 호남 주민분들, 다시 한번 존경합니다. 저는 광주 여자랑 결혼하려고요.

 

7.이집트는 금토가 주말이여서, 한 주가 끝났습니다. 아무리 박이 대통령이라도 한국이 더 좋긴 합니다;;;; 뭐 어떻게든 살아가야겠죠. 듀게 회원분들도 멘붕에서 빨리 회복하고 우리, 다 잘 살아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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