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피로와 차와 외로움과

2013.09.28 15:16

에아렌딜 조회 수:2001

이 글은 개인적인 잡상입니다.

불편하신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1.

자고 일어나면 피로가 좀 가신다, 몸이 좀 가볍다 하시는 분들 계십니까.

아마 적잖이 계시겠지요. 저는 그런 감각을 느껴본 지 좀 오래 되었습니다.

잠은 그냥 너무 졸리니까 자는 활동으로, 자고 일어나도 몸이 개운하다거나 피로가 가셨다거나 하는 감각은 이미 없습니다.

만성피로인 걸까요. 자고 나서 개운해졌다는 느낌이 그립습니다. 

늘 깨어도 머리 속 한 구석은 무겁습니다. 잠을 자라고 하면 24시간 내내 잘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최근의 제 기상은 일단 무슨 이유로든 눈이 떠지면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일의 반복입니다.


2.

전에도 썼지만 요즘 차를 내내 마시고 있습니다.

차를 마시지 않으면 정말 죽을 정도로 고통스럽다(이 표현을 어디서 봤는데...)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마시고 있습니다. 

차과자가 맛있는 게 있으면 차 마시는 게 더 즐겁겠지만 그 경우 지갑과 살 양쪽이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에 대체로 차만 마시고 있습니다. 

물론, 차만 마셔도 차는 맛있습니다. 신비한 차의 세계. 

과거에는 차값이 굉장히 비쌌을 텐데(특히 서구?) 그때 거기에 태어났으면 큰일이겠지 하곤 혼자 웃습니다.

루피시아에 갔을 때 티 허니란 걸 봤는데 이게 쪼만한 크기에 비해 상당히 비싸더군요. 날 위한 선물로 하나 집어오긴 했지만 아까워서 뜯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 시럽을 만들어서 단맛이 없으면 뭔가 씁쓸한 밀크 카라멜이 블렌드된 녹차(!)에 타서 마시고 있습니다. 이거 말은 녹차인데 막상 타보면 홍차같은 수색입니다.... 표기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루피시아에는 플레이버드 티가 많고 각종 블렌딩 차가 많아서 그런지 종종 괴이해 보이는 조합의 차가 있습니다. 위에 말한 밀크 카라멜 녹차도 그렇고... 심지어 스트로베리 바닐라 녹차도 있습니다.

스트로베리 바닐라는 사실 홍차인 줄 알고 사왔는데 사오고 보니까 녹차더군요. 일단 돈이 아까워서 마셔는 봤는데 웬걸, 향기가 너무나 달콤했습니다. 맛은 평범한 녹차였지만. 

제가 딸기향이 맘에 들어서 그런지 향기가 정말 좋았습니다. 한달만에 한 봉을 비워버릴 정도로. 

지금 또 한 봉을 사왔는데 이번에는 좀 아껴 마실랍니다. 다음엔 언제 사러갈 수 있을지 모르니...

루피시아 한국에서 철수해버려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3.

아래에 침엽수님의 외로움에 대한 글을 보고 쓰는 짤막글.

저는 제가 외로움을 안 타는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맞벌이 부모님과 네 살 터울의 오빠가 없는 집을 혼자 지키고 있으면서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때우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그래도 혼자 있어서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유치원에서도 누구랑 놀기보다는 혼자 블럭을 만들거나 그림책을 읽던 아이였다고 기억합니다. 희미하지만.

초등학교를 가도, 중학교를 가도 누군가와 있는 것이 훨씬 불편하고 고통스러웠지요.

나는 아마 외로움을 안 타는 인간이 아니고 누군가와 있는 게 불편한 인간인가봅니다.

성인이 된 지금은 어떻느냐 하면, 외롭습니다.

하지만 그 외로움은 마치 안개처럼 지긋한, 스며드는 듯한 외로움이죠.

누군가가 있어준다고 해서 해소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도 없으면 한결 차가워지는.

그냥 사회 부적응자겠지요. 누가 그랬더라 사회화가 덜 됐다지요?

아마 아주 옛날이었으면 어디 산골짝 한 구석에 혼자 살다가 호환을 당하는 그런 전개가 예상됩니다...

지금은 원하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인데 어딜 간들 나 혼자 살 수 있는 곳은 없겠지요? 

뭐 대단한 불편을 감수하면 혼자 살 수는 있겠지만.... 

[나에게서 30m 이상 멀어지거나 다가오지 마시오]라고 팻말이라도 붙여서 달고다니고픈 심정이군요.

멀어지지 말고, 너무 다가오지도 말고 있어준다면 참 좋을 텐데.

제가 꿈꾸는 공동체의 한 형태로, 언젠가 저 같은 인간이 잔뜩 모여서 만드는 사회공동체가 생기면 어떨까 하는 망상을 조금 해 봅니다. ....과연 잘 굴러갈지는 모르겠지만.

또 삼천포로 가는 얘기지만 이제는 너무 오래 혼자 있어서 그런지 누군가에게 반말을 쓰는 게 불편합니다. 


4.

잔인한오후 님이 글쓰기 클럽에 총대를 메신다구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모르겠지만.

저는 요즘 난독증이 생겼는지 긴 글은 잘 못 읽겠습니다. 시력도 점점 떨어지고 있어서 이러다 장님되겠다 하는 망상도 좀 해보고...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와서, 잔인한오후 님이 만드시면 굉장히 엄격한 기준의 클럽이 될 것 같아 사뭇 겁도 나는군요.

사실 제가 어쩌다 망상처럼 한 얘기가 왠지 현실화되다니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또 두렵기도 하고...

전 늘 그렇습니다. 망상은 망상으로 그쳐버리고 막상 그게 실현화된다면 겁부터 내죠.

일본가기 전에 얼마나 겁을 냈는지 모르실 겁니다.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굴었으니까요. 막상 가니까 아무 일 없었지만.

저는 요즘 저만 재밌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헛점투성이에 뭔가 알 수 없는 착오나 오점이 있을 이야기죠. 

그런 점을 잘 알기에 누가 내 이야기를 보고 이런저런 헛점을 지적해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글쓰기 클럽에 대해 생각해냈죠.

뭔가 묘하게 미안해지는군요.



5.

얘기가 계속 바뀌는데, 저는 참 개그에 대한 기준이 참 미묘하고도 낮습니다.

남들은 재미없어하는 이야기에 혼자서 웃죠.

제가 요즘 하고 있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통칭 와우에서 이런 개그가 곧잘 나와요. 

양조사들이 지나가는 마법사를 보고 '저 마법사는 왜 무기에 지능 마부(지능을 높여주는 마법 부여)를 안 했지?' 하면 상대편 양조사가 '이런 멍청이, 무기가 자기보다 머리가 좋아지면 어떻게 하겠어?'이런 식으로 대답을 하는데 이게 웃겨서 낄낄거립니다. 남들은 전혀 안 웃기겠지만.

남들이 그냥 평상시 얘기하는 만담(일본에서 보케랑 츳코미라고 하는)같은 주고받음도 재밌어서 ㅋㅋㅋ거립니다. 남들은 또 그런 절 보고 -_-한 표정을 지을 테고.

저 혼자만 있으면, 이렇게 세상이 평화롭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있는 세계로 가고 싶지 않네요.... 

물론 백수로 계속 있으면 제 어머니는 폭발하실 테고 저는 굶어죽을 테고... 



6.

간만에 윤도현밴드의 [사랑했나봐]를 다시 들었는데 또 신선하고 좋네요.

그 때는 정말 질리도록 듣다가, 질려서 그만 듣게 되는 노래가 아주 한참 나중에 또 들어보면 아 좋았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그리고 그 때, 그 노래를 듣던 때의 추억들이 이것저것 조개껍질 목걸이처럼 주렁주렁 엮여서 머릿속에 하나 둘 희미하게 지나가곤 합니다. 

뭔가 확실하게 기억나지는 않아도 희미한 기억들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어요.



7.

아차 또 아침 약을 먹는 걸 잊었군요. 지금이라도 먹어야겠어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40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6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579
154 성에와 얼어붙은 꽃 사진들 [4] Q 2014.12.30 1281
153 밑에 정명훈 이야기 (또)보니 생각나는 게 [14] 멀고먼길 2014.12.22 2578
152 <깨진 거울과 비틀즈 이야기> - 서태지와 아이들과 비틀즈의 유사성 [1] catgotmy 2014.12.03 996
151 [잡담글] 미국에 귀국, 제주도의 아름다움, 대한항공 비행기안에서 본 영화들 기타 [3] Q 2014.09.12 2090
150 특수메이크업의 왕자 딕 스미스옹이 타계했습니다. [2] Q 2014.08.01 1655
149 최근에 있었던 좋은일, '제자' 와 '학생' 의 차이, 괭이 사진 [5] Q 2014.06.15 2771
148 우리 모두는 원숭이다. [6] 자본주의의돼지 2014.04.30 2963
147 코바토인지 토바코인지... [6] 샌드맨 2014.04.03 2253
146 [바낭] 들꽃영화상 후보작 상영회, 트위터에 대한 잡상, 거대 고양이 [6] Q 2014.03.22 2157
145 추억의 정몽준. "너한테 물어봤냐? 내가 지금?" [3] chobo 2014.02.25 3621
144 [약간 욕설주의] 김연아는 대한민국 어쩌구에 대한 짤방 하나. [15] 국사무쌍13면팅 2014.02.18 5957
143 R. I. P. Maximilian Schell [5] Q 2014.02.02 1659
142 신장개점 (....) 축하드립니다 아울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4] Q 2014.01.24 950
141 기다리던 두 달이 20년 같았어요. [2] scherzo 2014.01.23 680
140 로버트 프랭크 영상 상영회 MoPS 2013.11.23 783
139 슬플때는 슬픈 노래를 들으시나요 신나는 노래를 들으시나요 (James Blake...) [8] Overgrown 2013.11.17 1456
138 [그래비티] 좋았습니다 (노 스포일러!) [7] Q 2013.10.07 2857
137 [이것저것] 미국에 귀국, [SVU] 새 시즌 유감, 바다 생물의 손자 [8] Q 2013.10.03 2591
» [바낭] 피로와 차와 외로움과 [3] 에아렌딜 2013.09.28 2001
135 - [8] 언젠가 2013.08.28 199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