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여름 봤어요(영화 스포)

2019.03.08 12:28

안유미 조회 수:1216


 1.이 영화 제목만 보고 처음엔 1984년에 만든 영환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포스터 때깔이 현대적이더군요. 그래서 '아 이거 기묘한 이야기의 스릴러 버전이겠군.'이란 생각이 들었죠. 아날로그 시절, 옆집에 사는 남자가 연쇄살인마일 거라고 굳게 믿는 소년이 나오는 이야기라...어떨지 궁금해서 봤어요.



 2.한데 문제는, 이런 종류의 영화는 갈 곳이 딱히 없어요.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느날 옆집 남자를 연쇄살인마라고 의심하게 됐다고 쳐요. 그러면 옆집 남자가 연쇄살인마일 확률은 몇%일까요? 0.01%일 수도 있고 0.05%일 수도 있고 잘하면 0.1%일 수도 있겠죠. 하여간 존나 낮단 말이예요.


 그런데 이 시츄에이션이 영화가 되어 버리면, 옆집 남자가 연쇄살인마일 확률이 50%란 말이죠. 왜냐면 옆집 남자가 연쇄살인마거나, 연쇄살인마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3.위에 썼듯이 이런 이야기가 영화가 되어 버리면 이야기가 뻗어나갈 곳이 없어요. 차라리 드라마라면 옆집 남자의 수상쩍은 모습들을 보여 주다가 1시즌이 끝날 때쯤 옆집 남자가 실은 연쇄살인마가 아니었고 연쇄살인마를 쫓는 사람이었다...라는 설정으로 갈 수도 있겠죠. 아니면 연쇄살인마의 친구거나, 원수거나...온갖 바리에이션이 있을 수 있어요.


 한데 포맷이 영화라면? 스릴러 영화에서 주인공이 옆집 남자가 살인마일 거라고 50분동안 의심했다면? 그럼 끝이예요. 왜냐면 옆집 남자가 살인마일 거라고 50분동안 의심해버리면 그 시점에서 남아있는 영화 시간은 약 4~50분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솔직이 말하면...주인공에게 50분동안 의심당한 놈은 아무리 살인마 같지 않아도 살인마일 수밖에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주인공이 50분 동안 의심했던 녀석이 연쇄살인마가 아니라면? 그럼 그 과정을 아무리 훌륭하게 뽑아냈더라도 그 영화는 3류 스릴러가 되는 거예요. 관객들은 영화를 보러 갈 때 이야기를 사러 가는 거지 긴장감을 사러 가는 게 아니니까요. 1시간 반짜리 영화에서 주인공이 어떤 놈을 의심하는 데 50분씩이나 썼다면, 그 놈은 살인마일 수밖에 없는 거죠.



 4.휴.



 5.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시간이 절반 정도 지났을 즈음...옆집 남자인 맥키가 살인마일 거라고 확신하게 됐어요. 주인공이 아직도 옆집 남자를 의심하고 있는 걸 보고요. 옆집 남자 맥키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무한히 발견되고, 맥키 역의 배우가 아무리 밝은 미소를 짓는 연기를 잘 해도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아무리 실력 좋은 작가라도 이 시점에서 새로운 범인을 만들어낼 수는 없거든요. 그건 시간상으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래서...이 영화가 아무리 게으르게 마무리되어도 나는 이 영화를 욕하지 않기로 했어요. 애초에 '옆집 남자가 살인마일까 아닐까'라는 이야기는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는 거니까요.



 6.어쨌든 결론적으로, 혼자 사는 옆집 백인 남자는 연쇄살인마가 맞긴 했어요. 한데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의외로 괜찮았어요. 마지막 부분쯤에서 잡히지 않은 살인마가 다시 돌아오는 건 뻔하지만, 거기서 혈투 끝에 적당히 당해주지 않아요. 오히려 주인공과 주인공 친구를 잡아가죠.


 그렇다고 거기서 주인공이 극적으로 탈출한다...? 같은 허황된 전개도 없어요. 주인공 친구는 썰려버리고 주인공도 곧 그렇게 될 거 같았는데...놀랍게도 살인마는 주인공을 풀어줘요. 언젠가 자신이 찾아올 날을 기다리면서 살라고요. 그대로 영화가 끝나죠. 나는 결말이 이렇게 찝찝한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괜찮았어요.


 

 7.이렇게 마지막 부분은 꽤 좋았는데 그 과정이 너무 진부하고 지루했어요. 차라리 이 영화가 주인공의 성인 시점을 다루고, 이 영화 부분은 짧게 플래시백으로 처리했다면 더 괜찮았을지도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늙은 살인마를 대비하느라 언제나 긴장 속에 살아가는 이야기였어도 재밌었을 것 같거든요. 보스턴리퍼에게 한번 털린 후 매순간 긴장하며 살던 하치너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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