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있음) [영웅] 보고 왔습니다

2023.03.02 18:01

Sonny 조회 수: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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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에 맞춰서 보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원작 뮤지컬을 보지는 못했으나 워낙에 명성이 자자해서 예매권을 사놓고는 못보고 있었는데, 이 영화랑 저랑은 또 인연이 이렇게 닿게 되네요. 어쩌면 이 영화를 보기에 최적의 시간대를 잘 고른 것 같기도 합니다.  내셔널리즘을 경계하는 저로서도 삼일절 같은 날에는 조금 더 경건한 마음으로 이런 영화를 볼 수 있게 되더군요.


영화의 도입부는 굉장히 비장합니다. 다소 작위적이긴 하지만 하얀 설원을 가로지르는 안중근이 등장합니다. 그 후 숲속에서 독립군들이 모여 함께 왼손의 약지를 자르고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한문을 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국가에 헌신한 영웅적인 인물들이 가장 극적인 장면을 통해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안중근의 이미지를 극적으로 배치하면서 영화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의 영웅적 행위와 사상적 측면을 영화로 본다면 이럴 것인데, 과연 개인 안중근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는지 영화는 묻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가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 가족들과 토닥대는 장면을 보여주며 그의 평범하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문제는 이 프롤로그 이후에 진행되는 가족 이야기부터 영화가 도식적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인물들이 기능적인 포지션에 머무르기 때문에 윤제균 사단 영화 특유의 상투성을 피해가지 못합니다. 다소 진중한 성격으로 대업을 짊어진 남자에게 아내가 있다면 여보란듯이 바가지를 긁는 역할입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끼니 걱정을 하는 소시민적 모성의 상징입니다. 대다수 조연들이 이런 식의 기능만을 합니다. 다른 독립군 조연들도 전부 다 기능적으로 소모되기 때문에 영화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특히나 영화가 안좋아지는 부분은 조연들이 유머를 시도할 때입니다. 박진주씨의 마진주와 조재윤씨의 우덕순이 서로 이상하게 생겼다면서 티격태격 웃음을 쥐어짜내는 부분을 보면 영화가 전체적인 유기성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인상마저 줍니다. 특히나 배정남씨가 연기한 '몸짱캐릭터'의 등장은 이 영화의 밀도를 심각하게 해친다는 느낌마저 줍니다. 오죽하면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예전에 [조폭마누라2]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 영화가 참 낡았다는 느낌을 오랜만에 받았습니다. 각 인물들이 저마다 필요한 곳에서 맵, 단, 짠의 느낌을 주려고 적재적소에 딱 가있으니까요.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기능적 캐릭터를 거의 극복하다시피 한 캐릭터는 김고은의 설희입니다. 왜냐하면 안중근에게는 없는 항일운동, 이토 히로부미 암살 작전에 참여하는 동기와 설움이 훨씬 더 직관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안중근이 왜 항일운동을 하는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했는지는 영화가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영화 상에서는 적당한 기회가 되니 이 참에 작전을 실행하자는 식으로 대충 다뤄지죠) 이른바 영웅 서사에서 범인이 영웅적 길을 밟기 시작하는 '안중근 더 비기닝'의 파트가 아예 실종되어있습니다. 그에 반해 설희의 스토리는 처음과 끝이 명확합니다. 그는 명성황후를 모시는 궁녀였고 명성황후가 어떻게 시해되는지를 눈 앞에서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본에게 분노하며 복수를 하고자 합니다. 그에게 일본은 단순한 침략자가 아니라 자신의 주인을 유린한 강도이자 살인범입니다. 합의된 주종관계에서 주인을 해한 사람에게 품는 아랫사람의 분노는 자신의 충성심에 입혀진 선명한 굴욕이며 반드시 해소해야 할 무엇이죠. 이 영화에서 항일운동을 가장 사적으로 잘 치환한 캐릭터이면서 "어떤 사람들은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며 독립운동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해주는 캐릭터입니다. 이 캐릭터 덕분에 관객들 역시도 다소 모호하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이입할 수 있게 됩니다. 


김고은씨의 연기도 좋습니다. 김고은씨는 파워풀한 가창력은 항일운동의 밑바닥에 깔린 울분과 비참함을 전달하는데 모자람이 없습니다. 이미지와 상반되는 힘있는 목소리가 이 영화에 없을 의외성을 만들어냅니다. 정성화씨의 안중근이라는 메인 캐릭터가 있음에도 김고은씨의 설희는 거의 겨울왕국의 엘사 같은 장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단히 감정적이고 클라이맥스에 시원하게 고음을 내지르는 그의 노래는 윤제균의 감성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기도 합니다. 아마 김고은씨의 설희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훨씬 더 밋밋하고 딱딱해졌을 것입니다. 그는 이 영화의 비밀병기라고 부를만 합니다.


이 영화 속에서 이진주씨나 조우진씨의 노래는 상당히 안정적입니다. 정성화씨의 노래도 주인공으로서의 무게를 딱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줄 틈이 없습니다. 그건 이 배우들의 연기가 나빠서가 아니라 워낙에 기능적으로만 쓰이기 때문에 입체성을 살릴 기회가 없는 결과일 것입니다. 장르적 캐릭터만 연기하다가 울부짖거나 고함치는 윤제균식 클라이맥스를 강요당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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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적인 각본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안중근이란 인물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일단 그는 원칙주의자입니다. 동시에 그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기어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합니다. 그는 일본에 대한 원한에 미쳐 날뛰는 군인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설희처럼 일본에 대한 사적인 원한이나 숭고함에 대한 개인적 집착이 엿보이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영화가 채워넣지 못한 공백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관객으로서 훨씬 더 복잡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애국심은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실천이 되는지, 분노가 상당부분 소거된 저항의식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 말이죠. 이것은 영화의 실패에 더 가깝겠지만 한편으로는 안중근 의사의 부분적인 진실에 가깝기도 합니다. 안중근이란 인간에게는 구도자로서의 고뇌, 현실과의 타협, 독립에 대한 신학적이면서 인간적인 믿음 같은 것을 더 파고들면 어땠을지요. 그는 도마(토마스) 안중근이기도 하니까요.


영화를 보고 찾아보니 의외로 일본인들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지지했다고도 합니다. 안중근이 옥중 보여준 인품에 실제로 반한 일본인 변호사도 있고 그에 대한 후대 일본인들의 해석도 의외로 다양하다고 합니다. 이것을 과연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당시의 정치적 반감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요. 타국가의 자국민 암살범을 옹호하게 되는 그 심리를 더 포괄적으로 보여준다면 안중근에 대한 영화는 단순한 "국뽕" 영화에서 벗어나 훨씬 더 이상하고 수상한 작품이 될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영웅]이 품고 있는 함의는 안중근이란 인물을 후대 사람들이 항일운동의 유물로 단순히 소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는 안내문으로서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안중근의 이야기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암살에서 시작해 재판을 받는 기간 동안의 이야기로 써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조금 과장해보면 안중근이란 인물이 가진 소재로서의 매력은 거의 잔 다르크에 필적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신성함을 추구하는 동시에 폭력으로 가장 타락한 인간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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