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지 좀 가물가물해서 일단 대충이나마 써놓고 이번 주에 다시 감상한 다음에 후기를 정리할 생각입니다. 뭔가 그냥 끄적거리기에는 제게 좀 아까운 영화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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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몇번이나 제목을 틀리게 말했습니다. 성적표와 김민영, 김민영의 성적표... 일반적으로 사물과 사람이 있을 때 소유격 조사는 사람의 뒤에 붙기 마련이죠. 그래서 김민영의 성적표가 훨씬 더 자연스러운 표현일 겁니다. 그런데 영화는 굳이 [성적표의 김민영]으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그걸 그대로 해석하면 성적표가 김민영을 소유하고 있거나, 한국의 김민영이란 표현처럼 성적표 안에 김민영이란 존재가 포함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영화는 후반에 가면 김민영이 어떻게 성적표에 붙잡혀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김민영은 그냥 김민영이 아니죠. 성적표에 사로잡힌 김민영입니다.


제목이 그렇지만 일단 영화의 주인공은 정희입니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 1부와 2부가 나눠져있는 것처럼 찍혀있습니다. 1부가 청주에 계속 머무르는 정희를 위주로 펼쳐진다면 2부는 서울에 올라가서 민영을 위주로 진행됩니다. 감독이 두명이라서 영화도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 것인지 정성일 평론가가 감독님들에게 묻던 질문을 다시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1부에서는 정희의 한가로운 삶에 초점을 맞춘다면 2부는 민영의 정신없는 삶에 초점을 맞춥니다. 과거의 우정을 잃어버린 채 남겨진 사람과 재회한 우정이 변해있음을 깨닫는 사람의 이야기로도 나눌 수 있을 겁니다.


1부만을 보면 이 영화의 프롤로그처럼도 보입니다. 청주에서 거주하는 정희의 삶에는 김민영도 없고 성적표도 없습니다. 수능이 끝난 후 정희는 성적표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황입니다. 이 영화에서 성적표란 평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분주하게 소모하는 삶의 양식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희는 아무 것도 바쁘게 하지 않습니다. 테니스장도 일반적인 여고 졸업생이 할 법한 알바직종이 아닙니다. 보통은 까페, 고깃집, 편의점, 극장 등 수많은 사람들을 바쁘게 대하는 그런 일들을 하죠. 그런데 정희는 손님도 별로 없고 하는 일도 크게 없어보이는 테니스장에서 일을 합니다. 이것도 사실은 본인의 능력이나 인상으로 뽑힌 게 아닙니다. 테니스장 사장님 아들이 알고 보니 정희가 수능시험때 손목시계를 양보해준 사람이었서 은혜갚는 명목으로 취직을 하게 된 거죠. 뭔가 얼렁뚱땅 흘러갑니다.


테니스장 알바의 풍경을 생각해보면 1부와 2부의 연결고리인 것처럼도 보입니다. 서로 바쁘게 공을 튀기는 운동을, 테니스장 알바는 그냥 보고 있으니까요. 한편으로 테니스장 사장 아들인 정일은 재수공부를 합니다. 또 다른 도전과 바쁜 삶을 정희는 바라보죠. 영화는 그런 정희를 보여주며 이렇다 할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정희는 그냥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아직 바쁜 삶의 폭풍 속으로 발을 들여놓기 전인, 혹은 원래부터 한가롭고 굳이 자신의 삶을 불사를 필요를 못느끼는 사람입니다. 정희 스스로도 초조해하거나 강박을 느끼진 않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수많은 고삼 애프터 수능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알바와 토익과 운동과 자격증 준비로 다시 한번 노력하는 삶을 살겠죠. 하지만 아주 많은 고삼들은 수능 이후 해방된 상태를 누릴 것입니다. 바쁘고 치열한 것만이 '바람직한' 삶의 형태일까요? 바쁘다는 것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바쁨을 삶의 형태로 추구하죠. 그리고 바쁘지 않음을 어떤 의무의 부작위로 치부합니다. 청주에서 테니스장 알바를 하는 정희의 하루하루는 보는 사람들에게 묻는 듯 합니다. 제가 이렇게 사는 게 나쁜 건가요?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그 평화롭고 편안한 시간을 지금 정희는 누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언젠가 정희는 수능이 끝나고 난 뒤 그 무위의 시간을 그리워하진 않을지. 청주에서 정희가 보내는 하루하루를 날씨로 표현한다면 그 한가로움이 보다 평화롭게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비 안옴. 바람 안붐. 햇볕 없음. 구름 적당.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시련의 연속입니다. 나름 알바를 열심히 하던 정희는 테니스장에서 실직(...)을 하게 되고 때마침 자신을 초대하는 김민영을 보러 서울에 올라가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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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났는데 정희의 바람과 달리 민영은 그렇게 반가운 기색이 없습니다. 사람을 기껏 불러놓고 본인은 계속 본인의 성적표 타령만 합니다. 정희는 할 게 없습니다. 그냥 멀뚱하게 민영의 이의제기를 구경만 합니다. 아, 도중에 첨삭도 좀 해주긴 하네요. 말같지도 않은 내용을 진지하게 써서 웃겼던 게 생각이 납니다. 그래도 청주에서 서울까지 친구가 올라왔으면 맛집이라도 같이 가고 서울 구경도 좀 하면서 둘이 여러가지 이야기라도 할 법한데요. 그 와중에 민영은 정희를 한심하게 보는 듯한 이야기도 합니다. 서울 쪽에서 거주하면 아무래도 지방에 머무르는 친구들을 무시하는 서울부심이 생기기도 하죠. 그래도 너무합니다. 정희가 잔뜩 챙긴 저 짐들을 보세요. 고작 1박을 할 건데 그 안에 놀거리와 먹거리를 잔뜩 싸왔습니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2부를 자기만 바쁜 민영과 조용히 소외당하는 정희의 구도로 밀고 나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독립영화라면, 현실에서 간혹 생기는 서러운 사건들을 쭉 밀고 나가면서 어쩌지 못하고 돌아와서 다시 청주에 조용히 머무르는 정희를 보여주며 끝났을 겁니다. 그러나 영화는 두번 꺾습니다. 계속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자기 일만 보던 (그런데 영화를 보면 민영이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ㅋ) 민영에게, 정희는 화를 냅니다. 어떻게 내가 왔는데 이렇게 자신을 찬밥 취급하냐고요. 정희가 민영에게 터트린 게 굉장히 의외입니다. 그냥 순박하게, 서러움을 꾹 참고 있을 것 같은 캐릭터였으니까요. 그 다음에도 의외입니다. 민영이 별 대꾸를 못하는 사이에 정희가 휙 가버리거나 민영이 뻔뻔하게 적반하장으로 밀고 나가거나 하면서 파국이 찾아올 것 같았는데, 안그렇습니다. 바로 다음컷으로 점프를 하는데 거기서 둘이 사이좋게 놀고 있습니다 ㅋㅋㅋ 이 부분을 이렇게 처리한 게 이 영화의 참 독특한 지점입니다. 서로 대화를 하고 사과를 나누고 이럴 것 같았는데 어느새 갑자기 놀고 있습니다ㅋㅋ 그런 걸 굳이 보여줄 필요도 없다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영화는 한번 더 꺾습니다. 그렇게 다시 친해져서 과거의 우정을 회복한 줄 알았는데 민영이 교수님을 만나뵙겠다며 훅 떠나버립니다. 친구를 서울로 불러놓고, 자기는 자기는 대구쪽으로 (대구대학교는 대구에 있진 않습니다만) 내려가버렸습니다. 쪽지 하나 덜렁 남겨놓고요. 민영은 여전히 성적표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친구를 잘 보살필 여력이 없습니다. 과거의 우정을 회복한 듯 했지만 정희는 성적표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민영은 성적표를 그냥 놔둘 수 없습니다. 


그렇게 민영이 떠나고 홀로 남은 정희는 민영의 사진첩이나 이런 저런 기록들을 훔쳐봅니다. 그 안에는 아이돌을 꿈꾸며 춤과 노래를 연습하는 모습도 있고 토익학원에 다니면서 느낀 소회들도 있습니다. 민영은 뭔가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그걸 위해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그걸 본 정희는 민영을 미워할 수만은 없게 됩니다. 민영이 정희를 이렇게 박대하는 건 정희에 대한 감정이 변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삶에 치이며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겠죠. 열심히 사는 삶에는 열심히 사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민영은 이전처럼 친구와 있을 때는 친구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것입니다. 혹은 그런 시기를 앞으로 오랫동안 보내야할지도 모르죠.


정희는 민영에게 편지를 남깁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성적표의 형태로 마무리됩니다. 정말 귀여우면서도 다정하지 않나요.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다른 의미가 깃들게 됩니다. 학교에서 주는 성적표, 학원에서 주는 성적표, 다른 사회적 관계에서 주는 성적표에 붙들린 민영에게 새로운 성적표가 추가됩니다. 그건 바로 정희가 주는 성적표입니다. 민영이 제일 집착하고 두려워하는 성적표라는 형태로 정희는 자신의 서운함을 표현하면서도, 민영이 정희가 준 이 성적표에도 더 매달리면서 둘의 우정에 열심이길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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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아무도 없는 밭에서 평화롭게 쑥을 캐는 중년 여성의 모습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지역 대회에 출품해서 입상을 하죠. 영화는 그 그림을 실제 풍경으로 치환하며 그림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안에는 쑥을 캐는 민영의 모습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 그림은 정희 자신의 꿈이 아니라 정희가 민영을 그 안에 데려다놓고 싶은 소망처럼 보입니다. 너무 바쁘게 사는 민영이, 고요한 세상에서 마음을 놓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3부로 나눌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희가 바라보는 정희의 세계, 정희가 바라보는 민영의 세계, 정희와 민영의 세계가 합쳐진 것을 꿈꾸는 세계... [성적표의 김민영]은 사실 정희의 시선이 제일 중요한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바라보지 못하는 세계가 있진 않을까. 바깥에서 바라본 우리의 세계는 어떠할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정희같은 친구가 필요할지도 모르죠. 성적표를 목숨처럼 여기고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를 안쓰러워하면서 어딘가에서 기다려줄 그런 친구 말입니다. 


@ 이 영화가 [고양이를 부탁해]를 계승했다고 본다면, 그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결국 헤어지는 이야기라기보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삶의 화살표가 점점 다른 방향을 향하면서도 함께 가기를 꿈꾸고 노력하는, 우정의 지속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태희가 지영과 함께하던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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