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을 읽고

2023.01.27 16:49

Sonny 조회 수:518

평어체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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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의 시작은 기괴하다. 평범하게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던 여자가 갑자기 다른 여자인 것처럼 말하기 시작한다. 무당이 접신한 것처럼 김지영은 학교 선배의 어투로 김지영 본인은 알 리 없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윽고 명절에 시댁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지영은 시어머니에게는 사돈댁이 되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말을 하기 시작한다. 시댁의 모든 사람들이 기겁하고 남편 대현은 지영을 데리고 황급히 자리를 뜬다. 이 증상은 밖에서 보면 아주 간단하다. 여자가 미친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미친 여자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아직 미치지 않은 독자들은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김지영에 대해 여러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김지영은 왜 미쳤는가. 왜 '저런 식으로' 미쳤는가. 미친 사람을 되돌려놓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가.이 질문들로 이어질 이야기는 [장화홍련 이야기]같은 옛 설화의 고전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 원한을 가진 여자들은 죽은 뒤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 왜냐하면 살아있을 적 당한 억울한 일을 풀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김지영도 마찬가지다. 죽지만 않았을 뿐이다. 귀신이 들렸다. 사람들 앞에서 발현되는 비정상의 형태가 어떻든, 김지영은 뭔가 풀지 못한 지독한 원이 있다.


이야기는 김지영의 어머니로 거슬러올라간다. 지영의 어머니는 당연한 것처럼 '여공' 노릇을 하며 벌어온 박봉을 자신의 남자형제들이 진학하는데 보탠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한 채 산다. 지영의 아버지와 결혼한 후 김지영의 할머니로부터 시집살이를 당한다. 특히 김지영의 할머니는 손자를 간절히 원했고 그 때문에 지영의 어머니는 지영의 여동생을 임신했었다가 낙태한다. 첫 딸을 가졌을 때, 두번째 딸을 가졌을 대 지영의 어머니는 어떤 축하도 받지 못한다. '다음에 아들 낳으면 되지!'라는 위로를 받는다. 딸들은 태어날 때부터 아들이 되지 못한 자의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나중에 막내남동생이 태어난다. 김지영은 아들의 프로토타입 실패작으로 인생을 시작한 셈이다. 그리고 김지영의 저 미친 현상은 어쩌면 대물림된 것이다.


그 뒤에 여러가지 일화들이 이어진다. 자신을 좋아한답시고 계속 괴롭히는 남자 짝꿍, 은근슬쩍 성희롱 하는 교사, 자신을 좋아한다면서 버스에 올라타서 쫓아온 남학생... 그의 주변에는 들짐승처럼 배회하는 어떤 남자들이 있다. 그들의 침범은 때론 일상적이고 때론 위협적이다. 남자로서 되물어보게 된다. 남자들에게 이런 일이 흔한가. 그것은 그냥 어쩌다 친구와 싸우거나 미친 놈이 얽힌 일인가. 단순한 불행으로 치부하기에 [82년생 김지영]에는 꼬박꼬박 통계표가 주석으로 따라붙는다. 이것은 아주 많은 여자들이 겪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설 속 고백이 최초도 아니다. 여자들은 이런 일상적 성폭력에 시달린다고 늘상 인터뷰들이 공개되곤 했다. 김지영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성실하게 앙케이트에 응답하고 있을 뿐이다. 여자로서 겪은 부조리한 일이 있으셨나요? 예,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의 시간흐름을 주목하게 된다. 이것은 한 여자가 태어나면서부터 엄마가 되고난 직후의 이야기다. 한 여자의 일평생에 가까운 이야기다. 어쩌면 이 소설의 가장 큰 핵심은 사건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들이 발발하는 간극이 일평생에 걸쳐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는 짝꿍의 괴롭힘을 받고, 조금 더 커서는 좋아한다는 남학생의 스토킹을 겪고, 커서는 대학교 동아리 선배로부터 "씹다버린 껌"이라는 모욕을 듣고. 남자의 일상화된 폭력은 여성을 계속 따라다닌다. 그런데 여성은 이에 대해 항의를 하는 것조차 힘들다. 어떤 폭력이 특정 주체로부터 계속 반복되는데 그것을 당하는 사람은 그러려니 하면서 평생을 참아야한다. 일평생동안 이런 괴롭힘이 예정되어있다면 괴롭힘당하는 사람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느닷없는 모욕과 공격을 계속해서 당하는 일이 아주 많이 발생한다면, 그리고 괴롭힘당하는 사람과 괴롭히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나눠져서 정해져있다면 그것이 바로 차별이다. 김지영에게도 분명히 좋은 동성 친구들과 서운했던 동성 친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지영의 기억 속에서 유난히 풍화되지 않고 남아있는 기억들은 남자들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공격과 모욕이다. 김지영은 완전히 무고하다. 그리고 남자들은 그 때마다 용서를 받고 아무 벌도 받지 않은 채 넘어간다. 오히려 김지영이 면박을 받거나 침묵을 지켜야한다. 여기에서 차별이 정신병으로 어떻게 도지는지 그 연결고리가 있다. 차별받는 사람들은 말을 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삼킨다. 왜냐하면 그 부당함을 표현할 때마다 같이 화를 내주는 대신 그러려니 하고 넘기라면서 그 분노를 존중하지 않기에. 김지영의 안에서 분노는 유해물질처럼 계속해서 쌓여간다.


김지영이 겪는 서러움은 모욕뿐이 아니다. 김지영은 자연스럽게 소외된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김지영은 자신이 더 활발한 성격인 걸 알고 등산동호회에서 활동하려하지만 그 때마다 여자들은 주요 자리에서 소외된다. '여자는 힘든 일 할 필요 없어.' 이것은 곧 취업준비를 할 때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같은 스펙의 남자동기생들에 비해 여학생들은 유난히 취업에 실패한다. 같은 조건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달리 적용된다. 그런가하면 김지영은 성희롱을 당했을 시 어떻게 행동하겠냐는 질문까지 받는다. 인간으로서 당하는 폭력에 인내할 것을 기업이 종용한다. [82년생 김지영]은 한국사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사회는 여자가 남자와 대등하게 일을 할 수 있단은 존재로 인식은 하고 있는 것인가. 김지영은 이번에도 그 부당한 질문들에 하고 싶은 말을 삼킨다.


어렵사리 취업을 하고도 김지영의 일생은 차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증명해야할 것은 자신의 능력뿐이 아니다. 그는 '남자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고군분투한다. 회식 자리에서도 버티고 있어야하고 거래처 사장의 성희롱 농담에도 견뎌야한다. 김지영의 침묵은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서 좋은 남편을 만났지만, 남편인 대현도 김지영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해주지 못한다. 이윽고 찾아온 임신 계획을 두고 대현은 '도와줄게', '한명이 가사에 전념해야지'같은 이야기로 김지영에게 자연스레 육아를 몰아준다. 김지영은 하던 일과 커리어와 월급과 경제적으로 자립했다는 자부심을 모두 잃는다. 대현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뒤늦게라도 김지영이 화를 내면 쩔쩔매며 사과를 한다. 그러나 곁에서 소외를 시키는 가장 강력한 주체가 된다. 남편이지만, 여자의 사회적 입지를 잘 모르니까.


아기를 낳으면서 김지영은 거의 무능력해진다. 그리고 엄마라는 이유로 모욕당한다. 임산부 배려석 앞에서는 자리를 양보받지 못하고 다른 여자에게 '임신했으면서도 지하철 타고 다닐 거면 그냥 나오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공원에서는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면서 커피를 마시다가 "맘충"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김지영은 이미 손목이 너무 아픈 상태인데도 육아를 그만 둘 수가 없는 상태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이유없는 모욕이다. 한국사회는 엄마를, 육아를 어떻게 취급하는가. 그것은 가장 최하계층의 일이다. 감히 눈 밖에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조금만 쉬는 모습을 보여도 바로 못마땅해지는 그런 것이다. 엄마란 존재는 그 누구든지 가장 간단하게 부릴 수 있고 그 어떤 자유시간이나 타협도 시도할 수 없는 노예같은 존재이다. 존재 자체에 대한 비하와 모멸은 계급을 곧 상징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천하다고 여기기에 김지영은 "자연스럽게" 욕을 먹는다. 그저 한숨 돌렸다는 이유로.


그리고 김지영이 그만둔 사이에 전직장에서는 남자 직원이 화장실에 도촬카메라를 숨겨놓고 여자직원들을 촬영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난다. 여기까지가 이 책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김지영의 인생이다.


김지영의 인생은 왜 정확히 아이를 낳고 난 후에 끝났을까. 그것은 주 타겟이 되는 독자들의 세대가 딱 그 지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부적인 요소를 배제한다면,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여자의 일생을 하나의 구간으로 정확히 정해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어머니가 되기까지다. 소설의 초반부로 돌아가보면 이 시사점은 더 명확해진다. 김지영은 한계에 몰려있다. 그래서 귀신이 들려있다. (혹은 남의 흉내를 내며 헛소리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로부터 태어나지 않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다. 그런데 어머니가 되는 여자는 미쳐버린다. 인간사회의 존속을 위해 가장 기본적인 임신, 출산, 육아는 그 당사자인 여성을 어느 지경으로 몰고가는가.


어머니가 되면 한 명의 인생이 책 안에서 멈춘다. 여성 개인으로서 살아가고 버텨내는 그 30여년의 세월 끝에 어머니가 되면, 직업을 잃고 육아에 시달리며 그 어떤 모욕으로부터도 자신을 지킬 수단이 없어진다. 책임은 인생 최고로 묵중해지는데 자존감은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이 시점을 뚫어내고 여자들은 홀로 살아낼 수 있는가. 사회는 어머니라는 위치를 여성의 가장 숭고하고 신성한 자리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왜 여성은 그 지점에 가면 돈도 못벌고, 집에서 남편 돈이나 축내는 기생충 취급을 받고, 아무도 신경써주지 않는 가사에 치이며 몸과 마음이 상해가는가. [82년생 김지영]은 산후우울증을 새롭게 정의한다. 그것은 육아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여지껏 쌓여온 여성으로서의 우울이 단지 최고점에 이르는 시점의 문제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여성우울증"이 있고, 그게 극대화되는 시점이 아이를 낳고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몇년도에 태어난 어떤 여자, [82년생 김지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엄마가 된 김지영"이나, "여자, 출산"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산후라는 기간이 클라이맥스를 이루지만 그 전까지 계속해서 여성이 당하는 차별들이 점점이 찍히며 사선을 찍고 있다가 아이를 낳고나면 그 사선이 가파르게 된다. 여자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주목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그럴려면 차라리 육아의 디테일한 어려움과 남편 혹은 시댁과의 번잡스러운 불화를 이야기하는 게 훨씬 더 집약적인 구성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순간, 김지영은 미친다. 어떤 여자들을 미쳐버리게 할만큼 차별과 소외가 중첩된다.


이 책을 단지 여성의 출산과 육아에만 집중해 볼 수 없는 것은, 퇴직한 김지영이 회사동료로부터 전 회사에서 남자직원이 여자화장실을 도촬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심지어 경력단절이라는 이벤트가 없어도 김지영이 미쳐버리기엔 충분한 사건이 마련되어있다. 만약 김지영이 그 도촬의 피해자였다면? 김지영의 목구멍에서는 다른 여자들의 목소리가 다른 형태로 나왔을 것이다. 이 소설에는 김지영이 미쳐버릴 두 가지 분기점이 있었는데 김지영은 그 중 하나의 길에 발걸음을 올려놨을 뿐이다. 조금만 더 운이 없었다면 이 두가지 사건을 한꺼번에 겪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꼭 경력단절이나 도촬이라는 개별 사건이 핵심이 아니다. 한국사회는 어떤 여자가 그냥 열심히 살기만 하는데 이 사회를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여자를 향한 모욕과 멸시와 폭력이 가득해서 여자를 미쳐버리게 만드는 곳이다.


에필로그는 더욱 씁쓸하다. 이 부분은 조금 작위적일지도 모른다. 김지영의 인생은 여태 어떤 정신과 남자 의사에 의해 회고되고 있었다. 미친 여자가 왜 미쳤는지 인생을 전체적으로 다 듣고 이해하면서도, 이 남자 의사는 "미혼"의 여성을 일자리에 뽑아야겠다고 혼자 생각한다. 김지영이 구원받지 못한 부조리는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이 책에서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실패한다. 그래서 이 책은 두가지 숙제를 남긴다. 김지영씨는 과연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야하는가. 그 이야기를 독자들은 어떻게 듣고 믿어줄 수 있는가. 남성에 대한 회의섞인 이 결말은 여성끼리의 연대를 돌려서 촉구하는 형식처럼 들린다. 일진 여학생들이 바바리맨을 잡아가고 김지영의 학교 선배나 직장 동료들이 그를 챙기고 서로 도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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