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고을 광주

2022.09.27 03:37

Sonny 조회 수:620

이 글을 쓰는 동기가 광주를 무슨 김대중 욕하면 큰일나는 싸구려 혐오를 하는 인간이라는 걸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어느 지역에서든 특별한 애호와 존경심을 사는 대표적 인물이 있고 그런 인물을 폄하하는 건 반감을 사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금기를 어느 지역만의 특색으로 끼워맞추고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나는 "위험지역"으로 묘사하는 게 바로 지역혐오라는 이 뻔하디 뻔한 말을 풀어쓰고 있자니 그냥 웃기네요. 하기사 커뮤니티에서도 친구를 못만드는 인간이 어느 지역에 가서 무슨 친구를 만들고 좋은 기억을 만들겠습니까. 혐오의 또 다른 뜻은 자기고립이고 또 다른 뜻은 나는 뭘 모르고 경험한 적도 없다입니다. 자유가 고생이 많습니다. 내키는대로 편견을 내뱉고서 그걸 변명하는데 착취당하고 있으니 말이죠. 가치판단 뜻은 알고 하는 소리인지....ㅎㅎ


시동은 불쾌하게 걸렸지만 유쾌하게 나아가봅니다. 저에게 광주는 조금 특별한 도시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명절 때마다 친가와 외가 친척들을 모두 만나러 가는 곳이었습니다. 광주보다 인구가 더 적은 도시에서 살던 저에게는 일년에 한두번 찾아갈 수 있는 별도시이기도 했죠. 광주, 백화점이 있는 곳! 신세계 백화점이 터미널에 들어왔을 때는 정말 신기한 느낌이었습니다. 제 고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번화가가 자리잡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는 서울 이전에 광주가 선망의 공간으로 먼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광주에 있는 전남대를 다녔었"었"습니다. 일시적 방문으로 혈연만 잠깐 확인하던 공간은 이제 학연으로 뿌리를 뻗어내리며 저에게 머물 곳이 된 것이죠. 광주의 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저는 부모가 아닌 다른 어른과의 동거생활을 잠깐 했습니다. 손자와 할머니의 관계는 명절 때에만 잠깐 보는 게 제일 행복했다는 교훈만 얻었습니다. "손주놈"으로서 할머니의 관용을 저는 너무 많이 바랬고 통제광이었던 할머니는 손자의 자유로움을 참지 못했습니다. 아침밥과 저녁밥으로 존경을 얻고 싶었던 할머니는 저의 잦은 외박과 밤늦은 통화에 치를 떨었습니다. 어쩌면 광주는 결별의 서막을 알리는 공간이었던 셈입니다.


할머니와 척력으로 서로 등지는만큼 대학교 친구들에게는 인력을 만들어내며 어울렸습니다. 남중 남고만 다니던 저에게 "여학우"의 존재는 정말 희한한 느낌이었고 갓 스무살들끼리 어울려 처음으로 술을 마시며 노는 것만큼 최고의 엔터테인먼트가 없었습니다. 맛도 모르는 소주를 그렇게 짠짠거리며 시덥지 않은 이야기에 괜히 빵빵 웃고 그랬죠. 특히 전대 상대 뒷골목은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흥분과 어지러움을 처음으로 가리킨 장소였습니다. 별 안주 안파는 실내 포차들을 고르고 또 고르면서 들어가면 뻔하게 있는 선배들에게 인사하고 같은 소모임 친구들은 모르는 같은 과 친구에게 으쓱 아는 척을 하고... (첫사랑 이야기는 뺍니다 ㅋㅋ 안그래도 라떼 끼가 낭낭) 예비역들은 왜 그렇게 고지식하면서 군대의 질서를 강요했던지요. 무슨 가요계 군기처럼 꼭 인사를 해야하고 넵넵거려야 하고...


그렇게 뒤늦은 사춘기로 얼룩진 도시는 이후 고군분투의 장으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전남대를 때려치우고 서울로 가고자 재수를 했던 곳이니까요. 군대에서 찐 살을 뺄려고 하루에 삼각김밥 두개만 먹으면서 괜히 객기를 부리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새벽 다섯시 반에 일어나서 싯업과 크런치를 하고 선식을 먹고 학원 가서 공부하고 저녁에는 조깅을 하고... 그러다 번아웃이 와서 한달간 학원에 안가버리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ㅋㅋㅋ 아무튼 이 곳에서도 별의별 일은 다 있었습니다. 아직도 노력 하면 전 이 시절을 떠올립니다. 치기어린 도시는 자발적 고행의 의미를 품게 되었죠.


광주는 다시 뜨문뜨문 내려오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광주에는 시침과 분침을 능가하는 진한 시간적 지표가 생겨났으니 그것이 바로 저의 사촌동생입니다. 찐빵같던 쌩 갓난얘기 시절부터 점점 자라나는 사촌동생을 보니 좀 신기하기도 하고 슬슬 쓸쓸해지기도 하더군요. 서너살의 사촌동생은 핸드폰 카메라로 자기 동영상을 찍는 걸 알 수 없을 정도로 좋아했습니다. 그냥 자기 영상을 보면서 미친 듯이 깔깔거리고 굴러다녔죠. 별 거 없는 집에서 참 열심히도 놀았습니다. 자신의 할머니나 엄마는 못해주는 것을 저는 해줄 수 있었죠. 그를 이불 한 가운데에 눕혀놓고 사정없이 꽉꽉 말아주었습니다. 사촌동생은 그 김밥 속에서 괴로워하면서 자기 몸이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사실에 신기하며 소리를 질러댔죠.


그런 사촌도 이제 고3이 되었고 저는 그에게 이전만큼 신기한 존재는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광주는 이제 명절 때마다 중학교 동창들끼리 모이는 아지트가 되었죠. 그 떄만큼은 육아에 열심이던 제 다른 친구도 튀어나와서 일탈을 즐깁니다. 광주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서 위스키와 함께 몇방울 남지 않은 체력과 혈기를 할짝이며 시시한 이야기를 해댑니다. 이제 광주는 잠깐이나마 과거가 다시 집회하는 곳이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광주는 저에게 여러 의미들이 되섞이는 도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첨단지구라는 곳이 떠오른다고 하더군요. 바 같은 곳을 갔는데 무슨 식물 이파리 같은 것들이 주렁주렁달린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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