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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애초에 퀴어퍼레이드를 함께 가기로 한 사람들이 있어서 이전과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퀴어퍼레이드를 맨 처음 갔을 때 덜렁 혼자 갔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인파 속에서 낯설어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먼저 생기더군요. 그에 반해 퀴어퍼레이드에 느끼는 감흥 자체는 확실히 좀 줄었습니다. 그 전날에 잠을 좀 못자서 몸이 찌뿌둥했던 것도 있고, 퀴어란 존재에 대해 그만큼 예전처럼 환상적인 기대를 갖기보다는 어느 정도 가까워진 친구 같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막 두근두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호기심보다는 적당히 자리잡고 술이나 마시고 오자... 라는 말년병장 같은 기분으로 먼저 가서 술부터 까고(?) 있었습니다. 소주나 맥주를 별로 안좋아해서 그나마 만들기 편한 칵테일을 스스로 말아먹고 있었네요. 그런데 날이 밝기도 하고 혼자 먹자니 영 취기가 안올라서 잭콕만 연거푸 세잔을 때렸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비비안님과 나비님이 무대에서 인사도 하고 풍물놀이패도 오고 미미시스터즈도 공연을 하고... 저는 여유롭게 돗자리 펴고 마시고 있다가 비올 것 같으면 우산 펴고 비 안오는 것 같으면 우산 접고 또 그렇게 술을 마셔댔습니다. 아예 내년 퀴퍼에는 쉐이커를 가지고 가서 적당히 이것저것 해먹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네요.


이번 퀴퍼에 같이 간 친구들은 퀴어퍼레이드에 처음 와본 친구들이었는데 제가 다 미안하더군요. 나름 기대를 가지고 왔는데 정말 아무 것도 못 즐기고 갔지 뭡니까. 지극히 제 개인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퀴어퍼레이드는 무대 자체보다는 퍼레이드에 놀러오는 퀴어들의 존재 자체가 훨씬 더 주목받는 자리인 것 같은데, 제 딴에는 무대 편하게 보라고 자리잡은 곳에 계속 앉아서 무대만 보는지라 정작 현장 자체는 많이 즐기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이런 현장감은 부스를 돌아다니면서 그 부스를 진행하는 분들을 직접 보고 또 이런 저런 굿즈도 사면서 평상시에는 맺기 힘든 비 퀴어와 퀴어와의 교점을 만드는 행위 자체가 의미있다고 보는데, 이번 퀴퍼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예 부스들을 구경도 못했지 뭡니까. 저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테니 구경 좀 하고들 오라고 했는데 물건 살 엄두를 못냈답니다. 공식 굿즈를 파는 부스는 줄이 꽤나 길어서 제가 해마다 사던 고무 밴드를 사지도 못했습니다. 남들은 다 부채다 깃발이다 흔들고 있었는데 저희는 밋밋하게 푸쳐핸접만... 이것 저것 돈 쓰면 퀴퍼에 발이라도 담그는 기분이 나고 굿즈들 보면서 괜히 흐뭇해지기도 하는데 그런 경험을 못시켜줘서 좀 아까웠습니다.


무엇보다 퍼레이드가 시작되면서 쏟아진 폭우가 폭우가... 빗방울이 어찌나 굵은지 우산에서 푸다다닥 닭날개 소리가 나더라고요. 혹시 몰라 가져간 접이용 1인용 우산에 옹기종기 모여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이게 퀴어퍼레이드인지 노아의 방주 체험인지... 처음에는 신께서 퀴어들을 적당히 찜쪄먹는 식으로 물 좀 뿌렸다가 다시 햇볕으로 쪘다가 하는 줄 알았는데 메뉴를 냉면으로 급선회를 해버렸습니다.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가 주최측과 무관한 흠뻑쇼에 온 몸이 젖어서 나중에는 우산 쓰는 게 무의미해지더군요. 다들 여름이라 시원하게 입고 왔는데 쇼생크 탈출의 명장면을 찍고 있었습니다. 어느 퀴어 분은 트위터에다가 '신께서 선한 퀴어를 가려내려는 이 시험에서 나는 탈락하였다...'라고 쓰셨는데 벼락만 안쳤지 우중중한 하늘에 자비없는 강우량 그리고 오갈 데 없는 퀴퍼 참석자들은 축축해진 옷을 참으며 퍼레이드를 나가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옆에서는 계속해서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우렁찬 소리가 울려퍼지는데 신이 있다면 비를 멈추는 대신 그에게 전기의 천사를 내려보내주시라고 속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퍼레이드를 따라가려는데 너무 지체가 되서 나중에는 윤석열 욕을 하고 그랬네요. 날씨는 다 대통령 탓입니다. 빌어먹을 자식!!


대망의 행진 시작! 탈출에 절박한 엑스트라들이 마지막 배를 잡으려는 것처럼 다들 허겁지겁 나가기 시작했고 저희 일행도 빗 속의 도로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런데 우산을 맞춰 쓰기가 너무 힘들어서 저는 과감히 나머지 사람들에게 우산을 양보했고 어차피 거의 젖은 거 모조리 적셔버리겠다면서 그냥 걷기 시작했습니다. 삼류 로맨스 영화에서 이별당한 주인공처럼 계속 걷는데 비를 너무 맞으니까 걸으면서 계속 세수를 하게 되더라구요. 핸드폰과 지갑을 우산 아래 일행에게 맡기고 걷는데 흥겨운 트럭도 안보여 음악도 안들려 이게 퍼레이드야 아니면 산티아고 성지순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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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_맞는_고전짤 ㅠㅠ


한 오분 정도 걷다가 이 고행을 지속하다가는 저희의 심신에 타격이 막대할 것 같아서 중지하고 옆의 을지로 3가역이었나 4가역이었나로 대피했습니다. 그곳에서도 퀴퍼에서 탈주한 사람들이 입수했다가 나온 꼬라지로 다들 진절머리를 내고 있더군요. 화장실에 들어가니 어떤 분은 아예 상의를 벗은 채로 물을 짜고 있고... 저희도 대충 옷을 말리고 쫄딱 젖은 채로 집에 돌아가는 대신!!! 갈빗집에 가서 돼지갈비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뒤풀이가 본 행사보다 좀 재미있었네요. 다들 억울해서 내년에 다시 한번 모이기로 했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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