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을 읽고

2022.06.16 16:07

thoma 조회 수:437

1910년 3월부터 6월 초까지 아사히 신문에 연재된 소설입니다. 

이전 소설 <그 후>의 그 후 이야기로 본다고 합니다. 연작이 아니고 인물들의 상황이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이 소설은 본문에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부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남편은 아내만 아내는 남편만 존재하는 듯이 살고 있는 부부입니다. 남편이 천신만고 끝에 도쿄의 관공서에서 일하는 덕에 가난하지만 그럭저럭 하루하루 생계가 가능합니다. 구멍난 구두도 새 코트의 필요성도 무시하고 살 수 있는 부부였는데 작은집에 얹혀 살던 동생의 학비 문제가 대두되며 가진 경제력 이상의 수완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이상하리만치 초연합니다. 주인공 소스케는 당사자 동생은 물론이고 독자가 보기에도 답답하리만치 차일피일 미루면서 현실 문제 해결에 소극적입니다. 소스케의 태도는 어떻게든 되겠지, 되는대로 될 것이야, 입니다. 자신이 나서서 일의 흐름을 트고 결정을 짓는 것을 하려 하지 않아요. 이런 일을 하려 하면 자신 뿐 아니라 바깥 세계 구성원들에게도 일련의 요구가 따르는데 그것을 회피하는 것 같습니다.


소스케와 아내 오요네가 가진 소극성이 특이하게 보일 즈음 이웃에 사는 집 주인 사카이와의 교제가 전개되고 그러면서 이 부부의 도쿄 생활 이전 사연이 서술됩니다. 이 사연이란 것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조금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 그냥 써버리자면 아내 오요네는 친구의 동거녀였는데 소스케와 서로 사랑하게(간통하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다니던 학교와 집에 그 일이 다 알려져 모든 사회적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부부만 남은 것이죠. 그리고 부부는 일종의 죄의식 속에 움츠리고 서로 이외의 외부와는 단절되어 살아갑니다. 


이들에겐 희귀하달 수 있는 집 주인 사카이와의 교제는 소스케의 삶과 대비되는, 어쩌면 소스케도 그렇게 살 수 있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불가능해진 삶의 형태를 보여 줍니다. 골목 끝 절벽 옆에 있는 해도 잘 안 드는 소스케의 셋집과 절벽 위에 여러 자녀들의 웃음 소리, 피아노 소리가 끊이지 않는 사카이의 집. 그 집의 귀여운 딸아이들, 윤기나는 마룻바닥과 다다미, 가스난방기, 무엇보다 사카이라는 사람의 사교적이고 배려심 있는 원만한 인품은 소스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소설에서 소스케가 대놓고 이런 것을 절실해 하진 않지만 독자는 자연스럽게 견주어 생각해 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카이네와의 인연 때문에 세월의 힘으로 어느정도 바래어 두고 견디던 과거의 사건이 눈 앞에 펼쳐질 위기가 닥쳤을 때 소스케는 고스란히 되살아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인내만으로 버티는 것은 언제든 자아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의 실제 내용이 커지는 것이 아니면 안 되었다.'라고 표현되어 있어요. 저는 이 문장이 나오는 부분에 몰입했습니다. 마음의 실제 내용은 어떻게 커질 수 있을까. 소스케는 종교와 좌선을 떠올립니다. 종교와 좌선의 도움을 얻기 위해 산사로 갑니다. 이 시도 후에 본인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지으면서도 큰일의 절반쯤은 끝난 것처럼 느낍니다. 열흘 동안의 시도이지만 그런 몸부림 자체가 적어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래와 같이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하였으니까요. 


'자신은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너머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중략) 그 자신은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날 수 없는 문이라면 일부러 거기까지 가는 것은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원래의 길로 다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고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문을 지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문을 지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아래에 옴짝달싹 못하고 서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저는 위에 인용한 부분이 세상의 모든 작가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으로도 읽혔습니다. 

제목 '문'은 이현우 서평가의 해설을 보니 연재하기 전에 아사히에 근무하는 제자에게 제목을 짓게 했다고 하네요. 소세키가 제목에 별 신경 안 썼고 남이 지어준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사두고 만지기만 하고 이번에 처음 읽었습니다. 부부의 일상으로 시작하여 부부의 일상으로 끝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나쓰메 소세키의 필력에 수긍하였습니다. 세세한 사소한 일상에 귀기울이게 하는 힘, 그 밑으로 흐르는 사건을 이어서 전체를 떠받치며 마무리하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실시간으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소설을 이렇게 즐기면서 읽을 수 있게 하고 동시에, 불시에 따귀를 때리는 듯한 문장이 튀어나오니까요. 

아래는 이 작품 연재 시기의 소세키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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