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동사서독 보고 왔습니다

2022.03.30 23:53

Sonny 조회 수: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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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영화를 볼 때 폰을 꺼놓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는 폰을 두번이나 켰습니다. 러닝타임이 몇분이나 남았나 확인하려고요. 정말이지 너무나 지루하더군요. 그냥 재미가 없는 게 아니라, 보는 내내 잡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가 앞으로 나아가질 않습니다. 에드워드 양이나 다른 감독들의 작품을 통해 슬로우 시네마에는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있다고 생각했는데, 왕가위의 이 작품은 저를 정말 힘들게 했습니다. 오죽하면 다 보고 나서 제가 왕가위의 다른 작품들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하는 걱정마저 들었습니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중경삼림을 나름 재미있게 봤던 것 같기도 한데...


90년대 왕가위의 태만한 작업 스케쥴은 유명했는데 동사서독에는 그 작업 스타일이 고스란히 녹아있는듯 했습니다. 편집에만 2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럴만합니다. 아름다운 컷들은 건졌는데, 그걸 이어붙여도 이야기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아예 스토리라는 게 없고 하염없는 독백만 있기 때문이죠. 누가 누구를 만났는데, 그 누구는 사실 누구의 누구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무협영화인데 무술 장면들이 눈에 잘 안들어옵니다. 왕가위 특유의 스텝 프린팅으로 화면들을 다 날려버리기도 했고, 그게 아니어도 대단히 짧거나 잘려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양조위는 액션을 별로 못합니다.


그럼에도 왕가위라는 감독의 개성을 좀 곱씹어볼 수는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이야기가 없는 대신, 시간만 있습니다. 그는 정지된 시간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막에서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습니다. 계절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는 날씨와 식물이 없습니다. 그저 하염없이 덥고, 모래바다만이 펼쳐집니다. 시간이 흘러야 인간이 성장을 하거나 쇠퇴를 하는데 동사서독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인물들의 모든 변화는 이미 끝나있고 변화는 변덕스럽게 이뤄집니다. 사람들은 홀연히 자취를 감춥니다. 멈춰있던 시간이 휙 지나가버리는거죠. 때문에 시간이 흘러야 축적되는 감정이나 관계도 없습니다. 늘 낯설거나 멀리 있습니다. 친구도 없고 연인은 이미 과거의 기억입니다. 멈춰있는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과거로 회귀하고 싶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왕가위 특유의 그 날아가는 화면들은 의미를 가집니다. 분명히 인지할 수 없는데 잔상만을 남긴 채 어느샌가 뭔가 지나갔다가 이내 흩어져버리는 그 화면이 이 영화의 시간감각과 서로 통합니다. 그렇게 멈춰있는 듯 프레임이 분절되는가 하면 어떤 장면에서는 기이할 정도로 인물들이 한 화면에서 멈춰서서 자기중심적인 대사만 던집니다. 이 때 인물과 인물은 거의 마주보지 않습니다.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하거나 시선이 서로 만나지 않는 방향을 향한 채로 이야기를 합니다. 동사서독 안의 인물들은 모두 자기 안에 갇혀있습니다. 아마 대표적인 씬이 구양봉과 모용연의 침대 장면일 것입니다. 이들은 상대방의 육체와 닿아있으면서도 자기가 만지고싶은 사람의 환상만을 떠올립니다. 어떤 인물도 이어지지 않고 모두가 헤어지거나 사라집니다. 사막의 모래알이 휩쓸리듯 그들도 흩어집니다.


그들은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영원히 만나지 못합니다. 오로지 신발을 신지 않는 홍찰과 그의 아내만이 헤어지지 않고 함께 떠납니다. (그리고 그조차도 손가락을 잘리고 꿈을 잃어버립니다) 왕가위가 만들어놓은 그 세계 안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덧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남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렇게 멀어져있고 시간도 지나버렸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 채로 마음만은 영원히 서두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풀어쓰긴 했지만 이런 의미들이 감흥으로 전달되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왕가위의 영화는 저에게 너무 늦게 도착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나이를 먹었거나, 아니면 영화가 나이를 먹었거나. 90년대에나 유효했던 스타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영화 속 사람들은 멈춰있는 채로 낭만을 이야기했지만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바래진 느낌입니다. 어찌됐든 왕가위의 다른 영화는 좀 각오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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