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7등팀 팬의 야구 관전기

2010.10.14 02:31

산체 조회 수:2599

두산과 삼성의 플레이오프 5차전

 

접전이 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두산이 초반에 5점을 선취하며 손쉽게 승리를 가져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호투하던 두산의 선발 히메네스 선수가 갑자기 볼을 남발하더니,

삼성의 4번 타자 최형우에게 기여코 홈런을 허용하며 추격의 빌미를 제공하죠.

 

결국 지칠대로 지친 양팀 투수진은 물이 오를대로 오른 상대팀 타선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고 휘청거립니다.

 

그런데 6회에 접어들자 거짓말 같이, 집중력이 최상에 달한 양팀 타선은 긴 침묵에 들어갑니다.

삼성에서 장원삼, 두산에서 이현승이 등장한 이후부터요.

그리고 그 두 투수들은 종반에 들어서 뜬금없이 경기를 투수전 양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실 저는 이 전까지 내심 두산을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두산과 SK의 리턴매치가 보고 싶었거든요.

김경문 감독과 김성근 감독이 써내려갈 드라마가 더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7회가 넘어가니 어느 팀도 응원하지 못하겠더군요.

 

마운드를 밟고 있는 두 투수들을 응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능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일단 저에게 오늘 게임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임태훈을 꼽겠습니다. 조연으로는 김상수와 손시헌.

하지만 절정의 순간이 아닌 다른 장면을 더 인상적으로 느끼는 관객이 있기도 하니까요.

 

저한테는 장원삼 선수와 이현승 선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이 그랬습니다.

 

 

오늘 플레이오프 5차전을 저같은 심정으로 본 사람이 또 있었던 모양인지 이런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145168

 

기사를 보니 '이건 분명이 올해 7등한 팀의 팬이 쓴 글이군'이라는게 느껴지더군요.

 

 

좀 격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저는 저 두 선수가 다른 색깔 유니폼을 입고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던져야 하는 그 상황이 억울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지금 삼성팬, 두산팬이신 분들께는 저 두 선수 모두 소중한 '자기 선수'이시겠지만,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자기 선수'를 잃게 된 팬의 심정이 그러했다는 말입니다.

 

응원하는 팀에 많은 선수가 그러하듯이 저 선수들에게 정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저들이 단순히 우리팀에서 잘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선수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팀에서 너무 많은 고생을 한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장원삼 선수는 12승으로 화려하게 데뷰를 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선수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대에서 최하위 라운드에서 지명이 된 별 가능성 없어 보이던 선수였습니다. 그런 그저그런 투수를 가능성만 보고 지명한 팀은

그 선수가 대학에 가서 기량이 일취월장할 때까지 4년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그 선수가 그 팀에 몸담은건 2년 뿐이었습니다.

팀이 바뀌는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혼자서 무너져가는 마운드를 지켜가던 좌완 영건은 그만한 성적을 내는 다른 팀 선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우를 받다가,

결국 바뀐 팀의 재정을 일으키기 위해 다른 팀으로 팔려갑니다. 아니 팔려가다가 다른 사람들이 안된다고 해서 되돌아 왔다가 한 시즌을 말아먹고 다시 팔려갑니다.

그리고 그 투수는 올해 13승, 3점대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했지만 왠일인지 친정팀에게는 8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는 아슷흐랄함을 보여준다는...

 

이현승 투수는 장원삼 선수와는 다른 의미에서 각별하죠.

장원삼 선수가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뒷바라지 못해줘서 미안한 장남이라는 느낌이었다면,

이현승 선수는 맨날 말썽만부리던 천덕꾸러기가 집안이 망해가려 하자 분연이 떨치고 일어서 이 집을 다시 세우기 위해 고생한 둘째의 느낌이었습니다.

이현승 선수는 지금도 승리보다는 패전이 많은 투수입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시간보다는, 2군이나 벤취에서 출전 기회를 노리던 시간이 많은 그렇고 그런 투수였죠.

사실 저는 이현승 선수만 나오면 가슴 졸이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롯데팬분들이 배장호 투수를 보는 심정이나 비슷할 겁니다.

그런데 09년이 되어 그 전에 팀의 주축을 이루던 선발 투수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기가 무섭게 그 투수는 맨 처음에 나와 공을 던지고, 이닝을 쳐먹고, 승리를 챙겨왔습니다.

항상 무모하고 조마조마해 보였던 그의 피칭은 어느새 능글맞아 보였고 잘만하면 팀을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시즌 후반 슬럼프가 찾아오게 되고 조금은 아쉽게 첫 풀타임 선발로서의 시즌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때 감독은 조금만 더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 내년에 더 나아질 것이라 새로운 에이스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에이스는 다른팀 유니폼을 입고 시즌을 시작하죠.

 

 

나머지는 뭐 아시는대로 입니다. 장원삼 선수는 시즌 내내 화려하진 않지만 안정적인 피칭을 보여주면서 삼성 마운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삼성 팬들을 가장 흥분 시켰던 투수는 사실 차우찬 선수죠. 후반기 크레이지 모드는 류현진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내가 다시 상대방 선발이 차우찬일 때 7등 팀 야구를 보러가면 내가 개다'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현승 선수는 초반 두산의 좌완 에이스로서 큰 기대를 모았지만, 제대로 이닝도 소화하지 못하고 투구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2군 강등, 아시안게임 예비 엔트리 탈락등

엄청난 수모를 당합니다. 게다가 상대방의 트레이드 카드였던 금민철 선수가 성공적인 선발 적응을 보여주면서 '10억 군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죠.

 

 

그리고 한 때 제가 가장 필요로 했던 두 투수들은

오늘 각자의 팀이 가장 필요로 하던 순간에 마운드에 서서 자신들의 역할을 다 했습니다.

 

 

좋은 경기였다고, 이겨서 축하한다고, 졌지만 수고했다고, 진심을 담아 양팀 선수들 그리고 팬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고마웠다고,

잠시 잠깐이지만, 내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것처럼 마음졸이고 흥분하고 응원할 수 있어서, 조금은 안타까웠지만 행복했다고,

앞으로도 열심히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공을 던져달라고 두 선수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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