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글의 형태로 작성해서 말투가 이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레오파드>의 엔딩에 관한 언급이 있어요.)

얼마 전에 세계영화사에 남는 위대한 촬영감독인 주세페 로투노가 타계했다. 로투노는 이탈리아의 거장들인 루키노 비스콘티(<백야>, <로코와 그의 형제들>, <레오파드>, <이방인> 등), 페데리코 펠리니(<사티리콘>, <로마>, <아마코드> 등), 비토리오 데 시카(<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해바라기>)의 많은 작품들에 참여했으며 존 휴스턴(<천지창조>), 마이크 니콜스(<헨리의 이야기>, <울프> 등), 밥 포시(<올 댓 재즈>), 테리 길리엄(<바론의 대모험>) 등 할리우드 감독들과도 함께 작업했다. 로투노가 촬영한 영화들 중 <레오파드>와 <올 댓 재즈>는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로투노가 참여한 수많은 걸작들 중에 나는 유독 루키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의 마지막 장면을 사랑한다. 내가 로투노를 추모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이 장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오파드>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 시기를 배경으로 한 귀족 가문의 몰락을 다루는 작품으로 백작 출신인 비스콘티의 자전적인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대략 1시간에 걸쳐서 이어지는 성대한 무도회 시퀀스에서 살리나 공작(버트 랭카스터)과 조카 탄크레디(알랭 들롱)의 약혼녀인 안젤리카(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 흔히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이제는 다시 없을 무도회 장면은 살리나 공작에게 있어 마치 죽음으로 가기 직전의 클라이맥스처럼 보인다.

무도회가 끝나고 동이 터올 무렵 살리나 공작은 거리를 걸어가다가 땅에 무릎을 꿇고 하늘의 별을 보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그리고 종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그는 일어나서 모자를 쓰고 어두운 골목쪽으로 천천히 이동한다. 전반적으로 밝고 화려한 색채가 돋보였던 무도회 장면에 비해 회색빛 톤으로 가득한 건조한 화면은 이전 장면과의 대비 효과와 함께 쓸쓸한 무드를 조성한다. 카메라는 곡예사 출신으로 몸놀림에 능한 버트 랭카스타의 우아한 발걸음을 따라서 천천히 왼쪽으로 팬을 한다. 살리나 공작의 앞에는 길고양이 한 마리가 서 있다가 그의 움직임에 흠칫 놀라서 왼쪽으로 이동한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이동하는 살리나 공작의 발소리가 매우 처연하게 들려온다. 이윽고 어둠 속으로 들어간 후 살리나 공작은 더 이상 형체는 보이지 않고 투박한 발소리만 그의 존재를 감지케한다. 그리고 곧 <대부>로 유명한 니노 로타가 작곡한 영화의 주제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FINE’라는 자막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시대의 전환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한 인물의 퇴장의 순간을 <레오파드>만큼 간결한 이미지로 표현하면서 깊은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은 드물다. 이제 노쇠한 살리나 공작에게 남아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인식하며 우아한 소멸의 길을 택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이 장면의 적막과 고독과 쓸쓸함 그리고 한 인간의 결단에 큰 감동을 받으며 멜랑콜리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야말로 시네마의 진수라 할 만하다.

<레오파드>의 경이로운 마지막 장면을 나에게 선사해준 주세페 로투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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