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로맨스

2011.03.08 20:18

메피스토 조회 수:1746

* 엄마가 시집가기전, 엄마를 좋아하던 사람(이하 J)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빠(그러니까, 메피스토의 외삼촌)의 선배였던 그는 어린시절부터 봐었던 엄마를 무척이나 좋아했었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말한마디 못붙였다고 합니다. J는 유복했지만 좋은 가정환경은 아니었던 집에서 자랐다고 해요. 옛날이니까 뭐 그렇죠. 잘살아도 남모르는, 혹은 동네사람 다 아는 사연이 있는집들 있잖아요. 항상 어둡고 침울했던 J는 20대 중후반 한창 나이에 결국 알콜중독에 걸렸다고 합니다. 알콜중독에 걸렸어도 엄마를 좋아하는 마음이 변한건 아니라고 하네요. 동네사람이 다 알았지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그것을 싫어했다고 하더군요. 당연하죠. 귀한 딸자식을 알콜중독에 걸린 사람과 엮이는걸 좋아할 아버지는 없으니까.

증조할아버지...그러니까, 엄마의 할아버지가 엄마 20대 무렵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경북 같은 도단위 지역유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네유지, 마을유지쯤은 되었던 외갓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바쁘게 일손을 거들고 있었는데 담장 위로 누군가 보이더래요. J가 술에 슬쩍 취한채로 왔다고 합니다. 외삼촌이 뛰어가 맞이했는데, J는 장례식에 온게 아니라 엄마가 보고싶어서 왔다고 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외삼촌에게 엄마는 장례식에 온 손님이니 그래도 대접은 해야한다고 들어오게 하시라고 얘길 했다죠. 외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어요. 장례식인지라 탐탁치 않다해도 찾아온 손님을 쫓아낼 수는 없었겠죠.
 
그렇게 술에 취한 J를 엄마가 상에 앉혀놓고 술을 한사발 부어줬다고 합니다. J는 아무말도 없이 술사발을 한번 보고, 엄마 얼굴을 한번 보고, 또 술사발을 한번 보고, 엄마 얼굴을 한번 보고. 그렇게 한참 앉아있다가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엄마는 일찍부터 서울에 자리를 잡았기에 장례가 끝난 뒤 서울로 다시 올라왔고 이후 J를 볼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얘기들은 초로의 중년, 혹은 노년이 되어 그 사람을 추억하면서 지금 어떻게 사는가..궁금해하는 이야기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과는 달리, J는 결국 교통사고를 당해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합니다. 알콜중독이라고 음주운전으로 차를 운전하다 죽은건 아니고, 차에 치여 죽었다고 해요. 엄마는 J가 죽고 상을 다 치른 다음에야 그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무심코 들었는데 괜히 애처로워집니다. 로맨스라고 할만한 무언가가 두사람 사이에서 피어났었던 것도 아니고, 건조하게 이야기하자면 누구나 짝사랑의 대상이 되거나, 짝사랑을 하는 경험은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말없이 술사발 한번 보고, 엄마 얼굴 한번 보고...그렇게 자기 마음을 전하다가 쓸쓸히 자리를 떠났다는 J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짠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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