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18 00:24
군 복무기간중 잠깐, 겨울동안 서해의 어느 섬에 있었어요. 주민이 많지 않은 작은 섬이었습니다.
전 행정병이었습니다. 저와 동기가 그 행정실을 지켰는데, 286AT 컴퓨터는 고장이 나있었죠.
유일한 서류작성 기계는 수동 타자기였고요. 기관장이 왔다갔다 하는 소리가 들리면 수동 타자기를 와다다다 치면서 (그거 사용하신 분들을 아시겠지만 소리가 좀 요란합니까) 일하는 티를 냈죠. 수동 타자기로 편지 써서 학교에 보내니 낭만 돋는다는 답변이 돌아오기도 했었습니다. 한번은 조리하사가 일주일간의 식단표를 주고 제가 그걸 타자로 치는데 졸았나봐요. 조리사가 장난으로 쓴 마스터베이션국을 그대로 쳐넣었지 뭡니까.
주말에는 섬도 쉽니다. 섬에 정박해있는 기러기(요즘은 참수리라고 하는듯)라고 가장 작은 군함들도 쉬지요.
PC가 고장났으니 굳이 사용할 일이 있을 때는 그 기러기에 가서 워드를 작성하고 프린트를 합니다.
토요일 오후 볕이 기러기 안으로 들어오고, 잔잔한 바다에 정박해있는 기러기가 요람처럼 흔들거리면 절로 잠이 쏟아지죠.
그렇게 꾸벅 졸다가 프린트 한 문서를 들고 다시 섬으로 돌아간 기억도 있군요.
점호 이후에는 식당에 내려가 조리사가 해주는 라면도 야식으로 먹었습니다.
그리고 월요일 밤 11시에는 내무실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엑스파일도 시청했었네요.
이 널널함이 육지(사령부)로 발령받으면서 깡그리 사라졌지만, 거기서는 또 거기서만의 어떤 괜찮은 일들이 생겨났죠.
그 괜찮은 일들 중에선 우연한 것들도 있고, 발악을 했는데 그게 또 순기능으로 된 것도 있고, 스스로 만들어 나간 것도 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군대라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오로지 생긴 기억이나 경험이 있는데, 그중 꽤 괜찮을 것들도 있고요,
쓸데 없는것들도 물론 많고, 거지같은 것들도 있지요. 그런데 그 거지같은 것들보단 괜찮은 것들이 전 더 많았던 거같습니다.
군대 말고 그냥 사회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무위도식 2년을 보낸다... 더 좋은 시기를 보낸다고 전 장담 못할 거 같아요.
아래 어떤 분께서 너무 거창하게 어떻게 그 시절과 화해하냐고 질문하시기에,
그런 생각 해본 적도 없는 저라 지극히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그냥 위에 적은 그런 곳이기도 하니까요.
+
육지 에피소드 하나. (여기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 것도 같지만...)
휴가 때 학교에서 데카메론(파솔리니)과 ZOO(그리너웨이) 비짜 비디오를 빌려놓고 관물함에 놨었죠.
그런데 하필 그때 관물함 검사가 있었고, 그게 딱 걸렸는데
검사하던 해병 장교가 그거 보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돌려줬어요.
내심 놀랬죠. 얼마 전에 토토로 테이프 반입하다가 헌병대에 압수당했는데 지인 동원해서 겨우 찾았었거든요.
2011.08.18 00:27
2011.08.18 00:30
2011.08.18 00:33
2011.08.18 00:33
2011.08.18 00:45
제가 거창해질수밖에 없는건‥면제자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뭐 잘못한거같은 기분이 점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