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팅을 부르는 비틀즈 티셔츠

2011.08.25 13:14

Koudelka 조회 수:4057

   오랜만이군요. 여름동안 침묵하고 가을이 오기까지 나름의 소소한 변화들이 있었습니다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일단 살던 동네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했고 출장을 다녀왔고 그 나머지는 또 대부분 일만 하며 지냈습니다. 요즘 몇 달동안 저는 왜 이렇게 바쁜 걸까요? 다크써클이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의 식상한 일상은 아닌데 하루가 빡빡하게 꽉차서 천천히 그러나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시간체험이랄까요.

 

   그 기간동안 처음으로 단독 외국출장을 다녀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잠들며 공항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는 스케줄을 감행했습니다. 이 고생은 사실 자처한 것인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 안전하게 현상유지만 할 것인가 아니면 좀 더 욕심을 갖고 도전적으로 할 것인가 하는 (촌스러운) 비장함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여러모로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은 계기가 필요했던 거에요. 물론 비지니스석을 타고 부띠끄 호텔에 머물면서 의욕을 가져도 되겠지만, 저는 그냥 이코노미 인생이니까요. 간만의 비행경험이라 그런지 힘들다기보다 설레고 견딜만 했던 걸 보면 체질인 건지도요. 뭐가 어찌됐든 나는 첫출장의 두 나라에서 무려, 주문을 받아옵니다.

 

   이 일정 중 저를 가장 난감하게 했던 건, 그동안 고질적이긴 했지만서도 하필 출장 내내 왼다리 오른다리 번갈아가며 찾아오시던 쥐가 모든 일정이 끝나고 공항으로 향하던 제게 일생일대의 가장 무시무시한 경련으로 거리 한복판에서 저를 급습했을 때였습니다.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절대 모르는 고통,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어요. 그때 누군가 나타나 괜찮냐고, 어디 아프냐고가 아닌 '너 쥐가 났구나' 하고 내 고통을 아는 척 했을 때의 당혹스러움과 안도감이라니요. 그 처방법을 아는 그가 결국 나를 안심시키고 놀라운 악력으로 내 왼발을 잡아 고통과 경련을 물리치는 것을 너무 부끄럽고 두렵게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낯선 경험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살아났구요, 무사히 공항까지 오는 택시를 타고 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심야의 공항에서 딤섬으로 가볍게 저녁을 해결하고 그 나라의 맥주 두 병을 마시며 객창감마저 느끼며 쥐의 고통은 잊어버렸으니 제 사주의 역맛살 하나 만큼은 거짓말이 아닌 듯 해요.           

 

   그리고 7월말 폭염 속에 이사를 했습니다. 사실 순서가 바뀌었지요. 이사를 하고 며칠만에 떠난 출장이었으니, 짐정리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사팀 직원들이 뜨자마자 가사노동의 종결을 보는 사람처럼 미친 듯 정리를 했습니다. 평소 더위를 타지않는 우아한-_- 체질이라고 여겼던 세월은 절인 배추처첨 땀과 염분에 찌든 몰골로 저를 배반했구요. 최소 한 달쯤 걸려 정리해야할 8할 이상의 일을 이사 당일과 다음날 다 해치워버렸습니다. 그러고나서 사흘 뒤에 바로 떠난 일정이었으니 어쩌면 저의 쥐는 그때부터 잠복하고 있다가 모든 스케줄이 끝나 긴장이 풀린 틈을 타서 급습했던 건지도요.

  

   그렇게 7월이 가고 8월이 가고 새 집이 휴양지인 양 미친듯 잠을 자는 것으로 아틀간의 짧은 휴가를 쓰고, 다시 회사에 출근해 해야할 일들에 몰두하느라 이사온 동네를 즐길 짬도 없이 보냈습니다. 무척 싫어하는 게 '오대수 정신' 이라 할당되고 맡겨진 일을 제 때 처리 안 하면 불안해 하는 건 그저 성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요즘의 저는 일중독자 초기를 지나 중기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나쁘지 않은 거겠죠.

 

   이사한 동네의 새로 등록한 피트니스센터가 내부수리를 하고 재개장 한다고 하는 기간이 자꾸 길어지는 바람에 밤에 할 일이 없어졌어요. 한 며칠은 집에 오자마자 나를 옥죄는 모든 액새서리와 브래지어를 벗어던지고 헐렁한 티셔츠로 갈아입고 코끼리 소파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는 휴식을 취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운동하던 사람인데. 그래서 엊그제부턴 조깅을 시작했어요. 줄넘기도 하나 챙기고 나선 걸음은 어느 행선지로 어떻게 갈 건지 정하지 않고 발길 닿는대로 걷다가 슬슬 속력을 내기 시작하다가 제법 빠른 속도로 달렸어요. 도심 한복판에서의 질주라니! 이건 평소 늘 꿈꿔오던 달리기가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그건 내 기분일 뿐 사실 그들은 제게 관심이 없을 것이므로 개의치 않고. 달려보니 이 동네가 얼마나 달릴 곳이 많은지를 깨닫고 흡족하면서, 이사왔다는 만족감과 안정감이 처음으로 밀려드는 것이었습니다. 드러난 허벅지에 닿는 바람이 서늘한 것이 이제 여름도 끝물이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어젯밤, 저녁약속으로 오늘 달리기는 어렵겠다 싶어 아쉬웠는데 생각보다 일찍 끝나, 연속된 음주로 인한 피로와 달리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산보나 하기로 합의를 보고 나선 걸음. 오래되어 화사하지 않지만 제가 좋아하는 이상한 옷 중 하나인 무려 '비틀즈 티셔츠' 를 입고 헐렁한 반바지에 런닝화는 아니지만 이뻐서 아끼는 나이키 비비화를 신고 동네를 크게 돌아오는데 누군가와 잠깐 눈이 마주쳤습니다. 일별 후 바로 고개를 돌리고 가던 길 가는데 갑자기 그가 다가오더군요. 혹시 자기가 아는 사람같은데 자기를 아느냐고. 저는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모르니까요. 그렇게 다시 내 길을 가는데 그가 다시 다가와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잠깐 얘기 좀 해도 되냐고 해요. 도는 분명 아니고, 이게 소위 말하는 '헌팅' 인 겁니까? , 불과 몇년 전까지 제게 급하게 쓴 연락처 쪽지를 들고 와서 떨리고 부끄러운 얼굴로 건네주고 가던 사람도 있었지만--;; 제 인생은 요즘 거리에서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는 시기인가 봅니다. 그러나 죽을 것 같은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발을 맡겼던 위태로운 절박함도 아니고, 저는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왜 그러시죠? 저 그 쪽 모르구요, 죄송하지만 관심 없거든요?'

 

  라고 삼단논법으로 점차 옥타브를 올려가며 단호하게 쏘아붙이고 차갑게 돌아섰더라는. 한 며칠은 더 저녁 달리기를 나갈 건데 다시 마주칠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만, 설사 그렇다한들 빛의 속도로 달리는 저를 아무도 붙잡지는 못할 거에요. 이렇듯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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