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 전에 작가님에게 굽신굽신 사죄를. 다운받아서 미안해요, 그치만 전 지금 병원이고, 너무 심심했다구요...전 이래봬도

당신이 데뷔할 때부터 쭉 지켜봐온 살암...어색해도 괜찮아는 못 샀지만 지금은 절판된 초기작들도 대부분 갖고 있다구.........

 

   권교정은 메르헨 혹은 고전의 재해석이나 판타지, SF를 주로 하는 작가죠. 그녀가 97년 이슈에서 백설공주를 재해석한 단편으로 데뷔

한 후 이슈와 화이트 등지에서 꽤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는 걸 지켜보았지만(전 당시 매월 6~8개 만화잡지를 구독하던 전직 새끼덕후...) 

오늘 읽은 '어색해도 괜찮아'는 연재가 아니라 단행본으로 발표한 작품이었어서 주목도가 낮았죠. 해서 오늘 처음 읽었는데, 의외의 발견.

권교정과 요시나가 후미의 작풍이 상당부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전에 요시나가 후미 관련 글을 적었을 때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녀는 디테일한 묘사에 강하죠. 또 고전이나 시대물에 대한 취향이 있고 현대물에서 취향에 관한 대화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 어라

그리고 둘 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송받을 수준은 아닌 데다 깔끔한 펜선과 빈 배경을 구사하는 화풍도 비슷하네요. 

 

   어쨌든, '어색해도 괜찮아'는 드물디 드문 권교정의 하이틴 로맨스, 현대물이자 학원물이죠. 2002년도에 다섯 권으로 완결된 중편임믜다.

순정만화가 아버지를 두었고 애니메이션과 만화, 판타지와 SF 소설에 지극한 취미가 있으며 이과에 가고싶지만 사실은 글을 쓰고 싶어하는

공부 잘 하는 여자아이가 주인공이죠. 남자주인공은 깔끔 상큼 자상해서 학교의 화제인물. 여자애와 우연히 몇 번 마주치고 관심을갖게

됐는데 알고 보니 집이 가까워서....블라블라블라. 순정만화니까 둘은 잘 돼요, ㅇㅇ. 권교정답게 감정선이 과하게 흘러가는 일은 없죠.

담백하지만 충실하고 사랑스러워요.

   그런데 제가 주목했던 디테일은, 주인공 애들이 데이트하는 모습이었어요. 그애들의 첫 데이트는 무려 SICAF. 시카프에 첫 데이트를 나가는

남녀 고등학생!!!!!!!!!!!!!!! '점심은 웬디스에서 먹자'라든지, '나 근처에 맛있는 데 알아'이러고 TGI에 데려가는 남자애와 그 비싼 가격 및 10%

부가세에 경악하는 여자애. '귀를 기울이면'의 OST를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서 전달해준다거나, 아니메 테잎을 빌려준다거나. 주인공 여자앨

좋아하는 도서관 담당 남자애와는 포풍 오덕대화를 두다다다 주고받죠. '반지전쟁 봤어?' '간달프 멋지지 않니?' '당연하지, 마법사 중의 마법사ㅠㅠ'

요부분은 정말 요시나가 후미와 찌찌뽕이었어요. 남자앤 신간 '실마릴리온'이 곧 출간된다며 자기가 챙겨놓을 테니 일착으로 빌려가라는 배려를...

여자애 벽엔 패트레이버의 2소대장 포스터가 붙어 있고, 남자애에게 은영전의 위대함을 울면서 설파하기도 하죠(권교정은 은영전 패러디를

특별편으로 잡지에 실었을 만큼 은영전 광팬이었어요. 헉, 그러고 보니 요시나가 후미도 동인지 시절 은영전 패러디를 하기도 했군요),

 

   어, 그냥, 위에 언급한 것들은 사실 요즘의 중고등학생 커플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잖아요. 뭐랄까,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왠지 한 시절 지나가

버린 듯한 느낌. 물론 위의 대화나 장면들과는 전혀 인연 없는 학창시절을 보낸 분들도 계시겠지만, 말했다시피 20세기말 전 한창...였기 때문에

그 디테일에 깨알같은 향수가 배어 있음을 깨닫고 문득 놀랐어요. 벌써, 그 시절은 지나가 버려서 '그땐 그랬지' 식의 얘깃거리가 돼 버렸나...랄까.

  암튼 이렇게 학창시절을 떠오르게 만드는 만화가 있다니 나도 좀 나이가 들긴 했나...싶네요 그래 난 n세대

 

   권교정 작가 아프다고 들었는데, 최근 예후는 어떤지 모르지만 어서 건강해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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