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光凞門)

2011.11.20 17:00

01410 조회 수:2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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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쓸 때 '광화문(光化門)'과 헷갈리게 만드는, '광희문(光凞門)'은 조선 도성 사소문 중 하나로서 흥인지문 동남쪽 장충동 가는 길에 있다.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을지로 중심가로부터는 한켠으로 살짝 비껴난 곳에 있기 때문에, 


동대문과 그 상가에 들르는 국내외의 수많은 관광객들도 이 곳은 지나쳐 가기 일쑤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볼거리 없이 그냥 성곽만 덜렁 달려있는 꾀죄죄한 문이기도 하다. 


그나마 21세기초부터 진행된 조명 관련 시책 덕에 밤에는 그럭저럭 볼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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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광희문은 - 도성 사대문 안 구석구석이 안 그런 곳 없겠지만서도 - 조선왕조 건국, 


아니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사람들과 그 호흡을 같이 해 오는 곳이다. 


일례로, 최근 드라마 '이산'이나 '백동수'에 등장했던 홍국영은


권세의 몰락 이후 양주군 제기현, 즉 지금의 제기동에 유배되었고, 


그가 유배를 떠나며 지나쳐갔던 도성문이 바로 광희문이다.

그가 도성에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유폐된 것은 지난날 그의 충의를 생각한 정조의 배려였지만, 


이미 미쳐버린 홍국영은 곧 제기현에서도 쫓겨나 강릉에 유배되었고 결국 굶어죽고 말았다. 


죽기 직전에 그의 오른쪽 눈 안의 점은 더욱 커져서 흡사 눈동자가 세 개로 보일 지경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가 제기현 야산에 유배되어 있을 당시에 이미 그는 권력 때문에 미쳐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봉두난발을 한 채 서까래에 기어다니는 애벌레나 지네 같은 것을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지나가는 길손이나 농부들을 향해 사약을 내리고 삼족을 멸하겠다는 등 시비를 걸어댔다고 한다.


홍국영이 흥인지문이 아닌 광희문을 통해 쫓겨난 이유는 아마도 


이 곳이 도성의 시신을 성 밖으로 내어 나가는 '시구문'이라서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 '왕의 남자' 에서 공길 대신 화살을 맞아 죽은 광대의 주검이 


비를 맞으며 공동묘지로 가는 장면, 그것의 실제 무대가 바로 이 광희문인 것이다. 


광희문 외에 실제 '시구문' 용도로 쓰이는 곳이 있긴 했지만 


지금의 남산 자유센타 옆에 있었고 도로가 나면서 헐렸다. 


일제시대(1937년)에 간행된 지도에 보면 일본인들도 그 문으로 시체를 내어 간 것으로 보인다. 


용산의 조선군(대한제국군이 아니라 조선반도 주재 일본군 군단급 병력을 이렇게 불렀다. 


이를테면 조선 방면군이란 의미이다) 병영 옆에 일본인들의 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강진 인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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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은 이런 찝찝한 용도의 관문 외에도 서민들의 생활 터전으로 기능하였다. 


지금은 다리를 놔서 쉽게 건너다닐 수 있는 작은 개울인 청계천도 


그 당시는 도성만 나갔다 하면 징검다리가 아니면 쉽게 건너기 어려운 지형장애물이었으니, 


왕십리에서 길 따라 올라온 사람들이 남촌으로 묵적골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길목이 이를테면 이 곳이다. 


훈련원의 단련된 정예 병사들도 이 곳을 통하여 도성 안팎으로 출입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광희문은 이를테면 현재의 양재동 인터체인지쯤 되는 그런 길목이었을 것이라는 상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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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광희문 근처에는 을지로, 종로의 번쩍거리는 표면적 얼굴이 아닌, 


거대 도시 서울의 이면의 마구 뒤섞인 모습이 있다. 


학생들이 즐겨 먹는 신당동 떡볶이와 


동대문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납품하는 지하 "시다방", 


그리고 60년대에 마이홈 장만했던 사람들의 단층 양옥집


(박근혜씨 옛날 자택도 이쯤에서 멀지 않다)과 태극당 양과자점 같은, 


공존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들이 의외로 같이 잘 어울려 있다. 



최근에는 더욱 국제적으로 섞여 있다. 


몽골 노동자들은 이 동네의 추석에도 쉬지 않는 전담 은행창구


(송금자는 모두 국가에서 체크한다)에서 고향으로 돈을 보낸다.


러시아에서 보따리를 지고 온 풍채 좋은 허여멀건한 언니가 


장충분식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와서 


유창한 국산말로 "아줌마 부대찌개 하나요" 라고 말한다. 


거리의 은행 지점에는 친절하게 키릴 문자로 쓴 안내문이 있다.


은행 건너에는 따뜻한 보르시치를 파는 구멍가게가 장사를 하고, 


그 옆에는 팔려고 내놓은 할리-데이빗슨 오토바이가 보도를 절반쯤 먹고 들어간다.

그러한 만화경같은 도심의 이면 가운데에 광희문은 그냥 조용히 앉아 있다.


예전에도 그러하였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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