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 속에서, 자신이 역사의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는 기분을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기분을 느끼다가도, 정신 없이 몰려드는 일상적인 일에 치이다 보면 '그래, 내가 뭘 생각하고 있었더라?' 하는 꼴이 되버려요, 네오에게 모피어스가 내민 양자택일의 손길, 빨간약과 파란약의 비유는 그래서 참으로 예리한 장면입니다, 결국 어떤 시점에 우리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이제 그만', 하고 궤도를 조정하게 됩니다, 그 선을 넘어가는 사람은 다시는 이쪽 편으로 돌아오지 못해요, 이전의 평범했던 삶으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거죠, 진실을 알게 된 사람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라는 것은 고문이나 마찬가지입니다(사랑하는 사람이 원수의 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삼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 어제 우연히도, '바더-마인호프'를 보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더 머릿 속을 맴돕니다, 영화 속에서 그냥 관찰자로 남을 수 있었던 울리케 마인호프는 창문을 뛰어 넘으므로서, 선을 넘어버립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죠, 딸들을 버리고 싶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버리게 되버리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무장 투쟁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그런 바람은 이상으로만 남게 되버리죠,

 

- 우리가 알고 있는 비극의 주인공들 또한, 이런 범주 하에서 그다지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 어떤 '선'을 넘어버리는 선택을 순간적으로 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들은 모두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결정됩니다, 오이디푸스, 햄릿... 2011년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이런 '진실'의 순간을 살고 있는 걸까요? 어쩌면 그럴지도,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런 순간은 매우 드물게 찰나에 오는 것이고, 체감하는 순간 바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때가 그런 때였지'라고 읇조리게 되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 FTA뿐 아니라, 최근 몇 년간 벌어진 수 많은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 안에서, 제가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은, 너무 빠르게, 너무 성급하게 그런 진실의 순간을 보았다고 판단하는 사람을 주위에서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21세기 들어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한국이든, 전세계적으로든) 매우 유기적으로 보이지 않게,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엄청난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하루하루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은 훗날 어떤 역사가가 책을 쓴다면 잘 묶어서 한 권의 주제로 출판해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일 겝니다, 2012년은 그래서 우리에게 위에 언급한 종류의 '선택'이 요구되는 해입니다, 당장 거리로 뛰어나가 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촛불시위 때처럼 그렇게 며칠, 몇 달 활동하고 다시 선 안쪽으로 들어오는 성급하고, 안온한 선택을 하지 말고, 좀 더 거시적이고, 긴 호흡으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어디까지,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 그것을 진지하게 실험하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역사책을 읽을 때 제가 매력을 느끼는 인물들은 천재적이고, 엄청난 능력으로 흐름을 좌지우지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 부딪혔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도로 그 안에서 흐름에 맞서 싸우는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자유를 찾아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신대륙으로 떠났던 이름 모를 사람들과, 조잡한 무기를 들고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던 남녀들, 혁명의 와중에서 소비에트를 구성하고 진정한 '자치'를 실현하려 했던 기록에 남지 않은 사람들...

 

- 어떤 방법이든 좋습니다, '불의'하다고 생각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다양한 형태로 나서면 됩니다, 당신이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은 언젠가는 잊혀지고, 당신의 이름도 남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움직임으로서 변화한 어떤 '흐름'은 어떤 형태로든 대표성을 띄고 역사에 남을 겁니다, 그것만으로, 좋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무언가가 바뀌지 않더라도, 실망하고 외면하지 말고,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 너무 빠르게 '진실'을 보았다고 자만하지 말고 말입니다, 그것은 종종 독단에 빠짐으로서, 이 순간만이 그 순간이라고 확신하므로서, 한 풀 꺾이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는, 다시 일상으로 후퇴하는 허무한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까, 다시 한 번 하고 싶은 말은, '옛 것은 죽었지만 새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FTA 통과를 막지 못했다고, 그것을 폐지시키지 못한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전선은 다시 만들어지고, 새로운 사건은 언제나 벌어지며, 모든 상황은 변합니다,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레닌의 일화가 생각나지요,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전 유럽이 제국주의 전쟁의 광풍으로 몸살을 앓고 있던 절망적인 와중에(동료들이 모두 자포자기와 타협주의에 몸을 맡길때), 레닌은 중립국 스위스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뜬금 없이 헤겔의 논리학을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책을 덮었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레닌주의'였고, 책을 덮고는 혼란의 러시아로 돌아와, 그 유명한 4월 테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칩니다, 동료 볼셰비키들조차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곧 레닌의 이 구호는 전 러시아를 뒤흔들게 됩니다,

 

- 상황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어떤 한 점을 가르키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과 같습니다, 마침 제가 읽고 있는 '하루키 잡문집'의 어떤 한 구절이 저의 시선을 잡아 끕니다, 하루키가 2006년 '프란츠 카프카 국제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체코의 신문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인데, 발췌하자면 이렇습니다,

 

"포스트코뮤니즘 시대에 접어들어 더 많은 체코 작가들이 '새것'과 '옛것'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코뮤니즘은 어떤 특별한 의미입니까? 예를 들어 1968년 '프라하의 봄'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일본의 전후 체험에서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 잘 아시겠지만 1968년은 우리 세대에게 더없이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당시 일본에서 우리는 대학생으로서 정치적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체코에서는 물론 '프라하의 봄'이 있었죠. 세계적으로 젊은이들이 '체제'를 향해 '노'를 외치고 있었던 셈입니다-그 상대가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간에. 하지만 그런 이상주의는 압도적인 권력에 의해 짓밟히고 맙니다. 그래도 그러한 강렬한 이상주의와 가혹한 좌절을 헤치고 나옴으로써 우리 세대는 다른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인함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체험 속에서 기성 문학의 틀을 초월해 이제까지는 없던 새로운 이야기의 틀을 만들어온 것입니다. 전후 일본은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만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진다고 해서 정신적으로도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의 예증이 된 것도 같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로 가려 하는가?', 현재 일본은 다시금그런 출발점으로 되돌아간 듯 보입니다. 거기에서는 이상주의가 다시 큰 힘을 발휘할 것 같은 예감도 듭니다만.

 

- 비가 오는 새벽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이젠 잘 모르겠군요; 그냥 끝으로, 사족 하나를 던져 놓고 자러 갑니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은 밤에는 잠이 오지 않겠지만,

 

"사람들은 진정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정말로 욕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 슬라보예 지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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