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려는 논쟁. 부끄러운 기억.

2012.01.08 15:37

레사 조회 수:1261

1. 대학 새내기 시절 이런저런 세상에 눈을 뜨고 나니 입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아니, 세상에 이렇게 (명백하게) 부조리한 일이 많고 그것이 나쁘다는 게 이토록 완벽한 논리 속에 정리가 되는데 왜 세상은 이걸 몰라주고 바뀌는 게 하나도 없을까? 이런 생각에 가득차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지만요.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생각하는 정의를 풀어놓으면서 동의를 받고 싶어 했지만, 또 때로는 그 동의를 통해서 같은 행동을 이끌어 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죠. 제 생각도 일면에서는 옳은 것이었겠지만, 다른 생각도 일면에서는 옳은 거였고, 어떤 판단을 하는데 있어 필요한 논리적 근거가 제가 선택한 그것들 보다 더 많이 필요한 경우가 (사실은 대부분)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2. 종종 그 시절 일기장을 들춰보며 하이킥을 하곤 하는데, 왜 그 땐 그랬지 하고 생각해 보면 그 때 제가 일종의 각성을 한 것이 저에게 너무 커다란 경험이었기 때문 같아요. 마치 그동안 눈이 멀어 있다가 어느 순간 광명을 얻은 것만 같은 충격. 이 충격과 경험이 너무 소중해서 이걸 남들과 나누고 싶어하고, 이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속으로) 답답하고,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속물들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그랬던 거 같아요.

3. 언젠가부터 제가 특정한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주제를 돌려버린다는 걸 느끼게 되었죠. 답답해하다가 그 이유가 제게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야기르 하는 건 내 생각은 이런데 니 생각은 어때? 라는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은 이러니 니 생각도 이래야 해! 라는 어줍잖은 강의 아닌 강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강의는 고상한 표현이고 솔직히 상대를 계몽하려했다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죠. 내 말이 다 맞으니까 너도 이렇게 생각해야 해. 네 생각을 들어보는 건 중요하지 않다니까.... 제 생각 속에 매몰되어 논리가 괴악해지는 것 조차 눈치채지 못했었어요.

4. 다행히도 이해심이 바다와 같이 넓은 제 친구들은 저의 이 흥분이 지나가길 조용히 기다려 주었습니다. 저도 운이 좋게 빨리 깨닫고 반성하기 시작했었구요. 그리고 누군가와 대화한다는 것, 논쟁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죠. 그건 상대방을 내 생각으로 설득함보다는 대화를 통해 더 다양한 의견들을 들어보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정리하는 거라는 거요. 물론 이 과정을 통해 누군가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떤 설득을 통해서라기 보다 의견들의 교환 속에서 그 사람이 다른 생각을 도출해낸 거라고 생각해요.

5. 이기려는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이만큼이면 충분할 수 있는 근거가 누구에게는 부족할 수 있어요.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는 주체는 바로 그 누군가 당사자이지 설득하려고 말하는 내가 아닌거죠.

6. 이런저런 일이 많은 듀게이지만, 제가 듀게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한 생각들을 조리있게 들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진보신당 지지자다보니 사실 듀게에서 마음아픈 글들도 보게 되지만 그것들도 다 좋다고 생각해요. 요근래 듀게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안타깝다 못해 보기 흉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보니 좀 속이 상해서 주절거려 봅니다. 조금은 진정되고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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