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보면 꼭 만나게 됩니다.
말이 죽어라 안 통하는 사람들. 흔히 말하는 꼴통이죠. 뭐 나이드신 분이야 머리가 굳은 거니 뭐 어쩔 수 없다, 라고 생각하겠지만. 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쉐이들도 아직 너무 풋풋해서 그러려니 이해를 하려고 해도. 거 있잖아요. 보기엔 멀쩡한 사람이고, 말 좀 통할 거 같으면서도 전혀 안 통하고 파일 에러난 mp3 파일처럼 했던 말 또 하고 영 못 알아먹는 사람.
차라리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면... 아니, 그래도 역시 안 통할 거 같습니다. 어떻게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 끝만 보고 수박을 이야기하면 호박으로 알아듣는데다 멀쩡한 말 꼬아 듣는 것은 기본이요, 딴다리 긁는 것도 이 정도면 신기원을 열었다고 해도 될 것만 같습니다. 이야기하다보면 그냥 주먹 불끈 쥐고 가슴 한 가운데를 팡팡 두들기게 되죠. 어휴, 이 꼴통을 우째! 하면서.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는 게 편하고 그러는 게 이기는 거라고 하지만. 마음속 깊이 일어나는 딥(deep)빡침은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순간 계급장 떼고 로그인 하고 상대방 멱살 대신 키보드 잡고 우다다다 불나도록 치고 있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이라고 인간의 언어가 안 통하는 꼴통이 없었겠습니까.
그럼 옛날 현명한 사람들은 이들을 어떻게 상대했을까요? 자료 모집 시간이 부족하니 지금 막 떠오르는 예제만 들어다가 4가지 케이스를 들어보지요.

 

1번, 말이 통할 때까지 이야기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꼴통들과 치고받은 사람은 역시 소크라테스지요.
상대는 말놀이의 대가들인 소피스트입니다. 이들을 상대로 한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라고 쓰고 말싸움법이라 읽습니다)은 산파술이죠. 극악히도 간략하게 왜곡을 섞어 말하자면, 이는 결국 조그만 딴지를 잽처럼 툭툭 걸어서 너 아까 이렇게 말했는데 혹시 그거 이거 아냐, 저거 아냐? 하고 유도하여 제풀에 어, 제가 잘못 알았나봐효. 하고 인정하게 만들지요.
이 상대법이 먹혀들기 위한 조건은 - 대화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에서의... 아마 트라시마코스였던가요, 그 꼴통은 소크라테스를 어떻게든 까대려고 안달이 난 사람이었죠. 또한 그는 소크라테스와 "오래 말을 섞으면" 자기가 진다는 사실을 알고 툭 내뱉은 뒤 자리를 피하려고 했습니다만, 소크라테스는 찰거머리처럼 계속 물고 늘어져 대화를 이어나갑니다.

이후의 말빨이란. 강하지 않게 적당하게 도발하고 상대의 결점을 발견해서 사알짝 흔들어주고, 그러면서 절대로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말하는 사람의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긴 하죠. 그렇다곤 해도 그 그리스 에게해의 암초 바다를 현란한 스윙으로 헤엄쳐가는 바다뱀을 연상하게끔 하는 소크라테스의 화술 앞에 마침내 소피스트가 굴복해서 자기 패배를 시인할 때는, 이제까지 들었던 정성과 에너지와 노고를 뛰어넘는 - 어마어마하게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즉, 대화가 진행된다면 소크라테스는 거의 반드시 이깁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그에게 독배를 준 까닭은 바로 그렇게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하지 않는 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겠지요.

 

2번, 지성이면 감천, 꼴통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수정안을 낸다.

 

1번도 인내심이 꽤나 필요한 케이스지만 2번만큼은 아니죠. 더군다나 1번안 보다 훨씬 더 성실함이 요구됩니다. 누구 예를 드는 게 좋을까요... 조선시대의 진정한 보수이자 그 이상으로 완고한 사람이었던 허조를 들겠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칼로 깎아놓은 듯한 보수였어요. 요즘의 보수라는 무늬가 프린트 된 껍닥을 쓴 게 아니라, 청렴하고 도덕적이고 애국심이 투철하며, 사회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삼아 개혁을 반대했죠.

그러니 개혁 및 새로운 시도에 평생을 걸었던 세종과 허조는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지요. 뭐 세종이 대놓고 허조가 죽기를 기다린 게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1번처럼 계속, 계속 설득을 하긴 했어요. 허조가 못 기다리고 먼저 세상을 하직한 거지요. A는 반대입니다, 라고 하면 A를 보완해서 A'와 A'', B와 C까지 마련해서 네가 말한 거 이렇게 고쳤는데 이건 어때? 하며 말을 건넵니다. 그래도 아닌 거 같은데요, 하는 말이 나오면 다시금 그에 맞춰 보완해 내밉니다. 시간은 오래 걸립니다. 1이 짧으면 몇 시간, 며칠 걸린다면 이건 몇년은 기본이고 수십년도 걸리죠.

세종과 허조가 충돌한 가장 큰 논쟁 중 하나는 백성들이 지방관리들의 잘못을 고발하게 하는 법이었습니다. 허조는 이 법안에 맹렬히 반대했습니다. 일개 백성들이 관리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비천한 것이 귀한 것을 고발하는 것이니, 사회의 기조가 흔들린다는 거죠.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지방수령들이 백성들을 마구 괴롭힌다면, 그건 어쩌게요? 세종은 참으로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만, 허조의 대전제는 "안 돼" 였던 고로 진짜 안 통합니다.
결국 끊긴 세종, 허조가 자리를 비우자 도승지에게 뒷담화를 깝니다.

 

"어휴, 저 고집불통!"

 

당시의 도승지는 바람의 도승지(...) 안숭선, 그는 허조가 잘못했어요, 하고 임금님을 토닥여줍니다. 그 말 듣고 기분이 풀린 세종은 허조의 생각도 받아들여 고발을 받아들이되 그 내용으로 처벌은 안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꼼수 안을 제시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공법(貢法)실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 나라의 세금을 매기는 조세법을 통째로 고치겠다는, 지금 봐도 대단히 무모하고도 야심찬 시도였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나라 안 신하들이 각자 자기 생각을 벌이고, 토론을 벌이고, 백성들 17만명에게 설문조사도 해보고, 시험 실시도 해보고, 실패도 많이 하고, 그래서 제대로 된 법률이 시행되기까지 대충 20년쯤 걸렸습니다. 그게 바로 국사시간에 배운 전분6등법, 연분9등법입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논의가 되고 수정이 되다보니 그 와중 허조, 맹사성, 하연 등등은 늙어죽고 맙니다(...)
허조는 살아있는 내내 법률 고치는 꼴을 보기 싫어했고 계속 옛날로 돌아가자고 말했습니다만. 20년 동안 계속 똑같은 문제를 논의해서인지 지쳐서인지 그 언제가처럼 극렬한 반대는 허조 외에도 차츰 사라져갔고... 특히 허조와 마찬가지로 반대자였으나 아직까지 살아있었던(...) 황희는 공법의 시행을 지휘하게 됩니다.  뭐어, 설득당했다기 보다는 지겨워서라도 그냥 한다라는 느낌도 있긴 하지만 말이죠.

 

3번, (겉으로) 비행기 띄워준다.

 

이건 정조입니다.
정조는 원래 성격 한 가닥하는 사람이었지요. 종갓집 22대손 답게 깐깐하고, 욱 잘 하고, 고집있고 기타등등. 그런데다가 말도 잘 했기에 무던히도 신하들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화도 잘 냈지만 칭찬에도 아주 능했습니다. 신하들에 뭐라뭐라 말도 안 되는 간언을 하면 화를 낼 때고 있지만 기뻐하며 칭찬하는 응수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을 읽다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문장구조는 분명 그래, 네 말이 맞아... 이지만 뭔가 조금씩 부조화 스럽습니다. 좀더 자세히 들어보면 욕하는 겁니다.
요즘 표현으로 바꾸자면 "그대의 뇌는 참으로 한 생각 밖에 없고 청순한 게 주름 하나 없는 비단자락 같구려." 라는 느낌.

 

정조로서는 야 이 닭 색휘들아 내가 지금 니들 칭찬하는 거 같냐? 느그들 내가 지금 뭔소리 하는 건지 모르지? 라고 생각했겠죠. 많은 예가 있지만 언젠가 게시판에서 이야기했던 최꼴통 이야기를 해보지요. 당시 수찬이던 최헌중이 "요즘 서학이 나돌고 세상이 어지러운 건 죄다 임금님 때문이어요!" 하는 식의 억지 상소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뭐 요즘 식으로 말하면 요즘 학교 폭력이 만연하고 왕따가 생기는 것은 다 대통령 때문이다, 란 느낌인데 여기에 대한 정조의 답이란 이랬습니다.

 

"그래 ^ㅅ^ 네가 한 말이 구구 절절이 맞아.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고 요것도 맞네? 가려운 데를 싹싹 긁어주는 게 까스활명수 같아. 너무 고마워서 그런데, 너 대사헌 할래?"

 

그렇게 파격적인 인사를 실시해버립니다. 당연 사람들은 난리가 났지요. 시파와 벽파가 힘을 합쳐 "임금님, 걔는 쫌 아닌데요..." 이라고 말릴 정도로요.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최헌중을 비판한 사람을 유배보내라는 결정까지 내립니다. "임금님은 화도 안 나세요? 쟤가 임금님 욕했다고요!" 하는 신하들의 말에는 "뭘, 내가 걔를 을-매나 이뻐하는데."라고 응수를 합니다.
이렇게 되니 최헌중이 아무래도 자기가 잘못한 거 같다고 살살 꼬리를 마는 글을 올립니다. 여기에 대한 정조의 대답은 걸작이었죠.

 

"괜찮아. 네가 만약 별 생각 없이 걍 딴지 걸려고 한 말이래도 그 말이 옳으면 상관없는 거야. 게다가 넌 그런 마음도 아니었잖아?"

 

가끔 사람이 한 말을 보면 그 사람의 내심이 어떤 기분인지 느끼곤 하는데, 이 부분의 실록 글귀를 읽으며 시궁창 바께스 100개 분량의 새까만 아우라가 행간 사이로 풀풀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최헌중은 아무래도 자기는 대사헌 될 그릇이 안 된다고 거절했는데, 정조는 감히 임금의 부름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황해도 병사로 보내버립니다. 즉, 군대를 보내버립니다(...)

그나마 이런 경우는 스무스하게 한 편이고, 누군가가 "임금님, A는 잘못이어요."하고 말하면 "그래, 네 말이 맞아. 근데 내 잘못은 B하고 C도 있거든? 그건 왜 말 안해?" 그러면서 귀양 크리를 때려버리기도 합니다(...) 칭찬을 하긴 하되 뒤통수를 치는 방법으로 당사자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바보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이걸 하려면 굉장히 머리가 좋고 언변도 뛰어나야 합니다. 따라서 엄청난 스트레스가 유발되니, 비밀 교환 편지나 일기를 쓰면서 뒷담화하면서 하는 걸 추천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 방법은 훨씬 간단해요.
꼴통들의 입을 막아버리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야 꽤 많긴 한데, 대표적으로 광해군을 들 수 있겠네요. 과거 시험장에서 나라가 어지러운 건 다 임금님 때문이어요. 임금님 처가들이 잔뜩 해먹고 하여간 문제 많아요! 라는 쀨의 답안지를 올린 임숙영이 있었지요. 뭐 이거 잘잘못이나 인과관계를 떠나 이런 식으로 일을 저지른다면 이게 참 뭐다 싶지요(...)
지극 당연히 광해군은 펄펄 뛰었고, 아주 청금록에서 이름을 파내고 처벌하려고 했지만 당시 오성과 한음을 비롯한 신하들이 뜯어말려서 - 과거에 합격처리가 됩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끝내 분을 삭이지 못했고, 대북과 더불어 반대파들을 하나 둘 처치하고 입을 다물게 했죠. 뭐 그런 건 연산군이 더 지독했지만 말여요. 그리하여, 그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다들 아실겁니다.
이 방법은 가장 간단하고 손쉬워보이지만, 부작용은 가장 크고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4번을 즐겨쓰곤 했지요.

 

결국, 꼴통들을 상대하려면 초인적인 인내심과 남보다 더 긴 수명(...), 그리고 박학한 지식과 화려한 말빨, 그리고 때론 저 새끼를 내가 아니면 누가 구원하리, 라는 진솔한 희생정신이 필요하다는 거죠. 이쯤 되면 절로 피곤해지니 안 싸우는 게 이기는 거겠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평생 안 싸우고 살겠어요. 만약에 싸우게 된다면, 그리고 확실히 결판을 내고 싶다면 위의 옛 성현들의 방법들을 써 보세요. 4번만은 말고요.

 

뭐 그런 거지요.

 

졸립니다. 모두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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