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빨갱이, 매카시즘

2012.01.09 19:47

LH 조회 수:1629


어떤 신문사의 사설에서 매카시즘 이야기를 꺼냈네요.
여러 가지 면에서 좀 의외이긴 하지만, 아무튼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몰아버리는 일은 꽤 많았고, 그들을 인신공격하고 박해하는 일도 꽤 많이 벌어졌었습니다.

대표적인 걸로 빨갱이가 있겠지요.
이 말의 사전적 의미를 따져본다면 빨간 사람, 정도의 뜻으로 되겠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의미가 더 친숙하지요. 대체로 욕설로 잘 쓰이니 말입니다. 바로 공산주의자를 비하하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빨갱이만큼 남용되고 오용된 말이 또 있을까요.
일제시대 즈음만 하더라도 이건 그냥 동요에도 쓰일만큼 평범한 말이었습니다만, 차츰 사회적 의미를 담아 - 욕설이 되었습니다. 1948년에도 관제 데모의 주최측이 참석 안 한 사람들을 싸잡아 빨갱이라고 욕해서 기사가 나온 것을 본다면, 이미 꽤나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많이 쓰이긴 쓰였습니다. 자유당에 입당 안 했다고 빨갱이라고 몰린 사람도 있었고요. 지나가던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빨갱이라며 두들겨 패기도 하고, 대통령 욕했다고 빨갱이라고 하기도 했죠. 하여간 개나 소나 닭이나 빨갱빨갱빨갱. 단어만 들어도 귀 안의 딱지가 욱신거릴 정도로 남용되었습니다. 사실 그래서 문제여요, 너무 쓰이다보니 옳지 못한 데 쓰인 용례가 너무나도 많단 말입니다.

 

말이란 하면 할 수록 그 가치가 가벼워지고 실수가 늘지요. 빨갱이란 말도 그렇습니다. 너무 많이 쓰이고, 개나 소나 쓰고, 그 말이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너무 많이 쓰여지다보니 - 한 마디로 임팩트가 덜해지고 그 가치 역시 빛이 바랩니다. 뭐, 정말 공산주의자도 있긴 하겠죠. 남한의 전복을 꿈꾸며 북한 지상낙원의 건설을 꿈꾸는 미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세상에 얼마나 이상한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이 없겠어요. 문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마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가혹하게 맞고, 괴롭힘 당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단 말입니다.

오랫동안 빨갱이라는 낙인은 인권이고 뭐고 존중을 받기는 커녕, 그 자리에서 때려죽여도 상관 없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조봉암 선생이나 인혁당 등등의 사건까지 이야기할 것도 없습니다. 정말 정치와 상관도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고 상처받았는데요. 한국전쟁 당시, 한강 다리가 끊어져서 피난 가지 못한 사람들은 서울을 사수하겠다던 이승만의 목소리라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신주단지처럼 붙들고 오도가도 못하던 사람들은 3개월 뒤 서울이 수복되자 빨갱이로 몰렸거든요. 제일 끔찍한 일은 제주도나 거창, 강성 등지에서 남녀 불문은 물론, 10대 아이까지 마구 학살한 다음 빨갱이를 많이 죽였다고 의기양양해했다는 거지요.
그렇게 죽은 사람들, 누가 자기가 빨갱이라고 했겠습니까. 아니라고 했겠지요. 또 정말 아닌 사람도 있었겠고요. 빨갱이가 아니라는 증명인 양민증을 움켜쥐고 죽어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재판도 못 받고, 억울한 것도 못 풀고 죽어갔겠죠. 자신의 가족들을 남겨둔 채. 또 그 뒤로, 살아남은 가족들은 가슴의 피멍을 안은 채로 빨갱이의 가족들이라고 박해를 받아야 했지요.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요.

 

요즘도 가끔, 너 빨갱이지? 라는 말은 모든 토론이나 상황을 한 순간에 끝내버리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빨갱이인 순간 더 이상 이야기를 할 것도 없고, 의견을 경청할 것도 없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서 몰매를 치면 되는 - 좀 극단적으로 - 세상의 적으로 간주되는 거죠.
아, 그래도 빨갱이가 있으면 세상 일이 많이 편하긴 해요. 사회적인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토론과 논쟁, 합의를 통해 진통을 겪고 시간을 들이고 수정을 해야 하는 법인데. 상대가 빨갱이라면 그런 거 없이 다 때려잡고 그냥 지도자가 원하는 대로 쭉쭉 밀고 나가면 되니 말입니다. 야, 신난다!
...신날 리가 있나요. 이런 고양이 뿔.

 

언제라도 가장 무서운 건 저건 빨갱이니까 함부로 때리거나, 괴롭히거나, 심지어 죽여도 괜찮다는 생각 그 자체입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벌어져서 물고문을 비롯한 가혹행위가 도마 위에 오르자, 당시 일선 경찰들은 그러면 어떻게 용공분자들을 잡아내느냐, 하고 우려했던 점입니다. 빨갱이를 잡아내려면 고문도 할 수 있다거 생각했던 거죠. 사람이 죽었는데! 어쩜 이렇게 극단적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정상이 아닌 거여요. 사람을 괴롭히면서 예술이니 뭐니 하는 끔찍한 말도 나올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죠.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제가 전쟁을 겪지 않았으며, 생각에 여유가 있어 말랑말랑하다는 말이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갑갑해할 것은 없습니다.

지금만 그런 것도 아니고 언제나 사람은 자신과 남을 구분하려고 했으니까요.
그게 예전에는 양반 혹은 상놈이고, 서인 남인 당파이고, 흑인 백인 인종차별이며, 언젠가 먼 훗날에는 어스노이드와 스페이스노이드가 되겠지요. (응?) 그렇게 내가 아닌 타인에게 쟤들은 이렇다 어떻다 편견을 부여합니다.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더라도,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빨갱이든 이단이든 꼴통보수건 무슨 카테고리이든 아무튼 간에 몰아 버리고 나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이건 정말 보수든 진보든 안드로메다든 해선 안 되는 쪽팔린 짓입니다.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억울하게 몰려 다치고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죠.

 

아무리 상대가 꼴통에 마초에 꼴페에 재떨이에 국수를 담아먹는 사람이라도,
그가 인간이라며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인간이니 말입니다.


오늘도 졸립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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