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가지 못했습니다

2012.02.09 00:30

에아렌딜 조회 수:10148

병원에 예약을 넣어뒀었습니다

나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어머니가 불러 세우더군요

어디 가냐고 하길래 병원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절 붙잡고 한참 이야기를 하십니다.

네가 뭐가 우울하냐고.

배가 부르고 하는 일은 없으니 우울하다 우울하다 소리가 나오는 거다.

나는 너 생각만 하면 답답해 죽겠다.

나는 지금 온몸이 아프고 일은 그만뒀고(어머니는 지난 달 이후로 직장을 그만두셨습니다), 팔다리에 수족냉증이 오는데 테레비를 보니 그게 오면 손발을 다 잘라내야 한다더라.

나는 이것 때문에 어딜 나가지도 못하겠고, 그 프로그램에서 좋다는 음식 다 적어뒀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너는 우울하다는 소리가 나오냐?

너보다 내가 더 우울하다.

나는 너 살찐 것도 답답해서 그토록 살빼라 이야기를 해도 살도 안빼고, 내가 돈 들여서 한의원에 가서 다이어트 프로그램도 받게 했는데 너는 왜 이러냐.

내가 어찌나 답답해서 너희 오빠한테 전화했더니 너희 오빠도 그러더라. 배가 불러서 그런 헛생각이나 하는 거라고.

정신병원 같은 데 가서 뭐 할거냐. 인생 망칠 거냐?

너도 이번에 면허 따는데 정신과 한 번 갔다고 며칠을 수속 때문에 잡아먹었지 않느냐. 정신과 가면 너는 인생 망치는 거다. 인생 끝장난 거다.

자꾸 병원 가려고 하지 말고 돈이나 벌 생각하고, 밖에 나가서 햇볕을 쬐라.

내가 이렇게 힘들고 아픈데, 너는 어미 벌어 먹일 생각 안하고 왜 맨날 우울하다 힘들다 아프다는 소리만 하냐?

이상하지요.

지금껏 어머니한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냥 한없이 눈물이 흐르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참 차분했습니다.

자기 상처만 아프다고 할 수 있는 어머니.

내 상처밖에 돌볼 줄 모르는 나도 어머니와 참 닮았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이 모녀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더 이상 어머니에게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머니가 말한 대로 나는 최악의 인간인 것이겠지요.

어머니 말씀이 뭐가 틀리겠습니까.

나는 우울한 게 아니고 배가 불렀나 보지요.

집안에 틀어박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게, 다 배가 불러서 그런 것이겠지요.

 

내 방 문을 나서는 것도 무섭기 짝이 없습니다.

무언가를 하러 나가야 한다는 상황이 너무나 끔찍합니다.

생각해보면 학기 중에는 공부에 미친 듯 매달렸습니다.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고, 그 생각으로 매진할 수 있었죠.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점이 있었으니까 어떻게 성적은 잘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것 뿐이지요.

사회에 나갔을 때의 그 마음 부서질 듯한 기억들이 생각이 납니다.

아무것도 못하는 내가 떠밀려서 취직을 해서, 평생 동안 먹은 욕보다 더 많은 욕을 먹고...

그 고함 소리와 무서운 표정들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생각날 때마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뭔가 하려 할때마다 너 따위가 뭘 할 수 있느냐고 소리가 다 들려오는 것 같아요.

 

아픈 어머니를 벌어먹여 살리지 못해서 미안했지만, 나는 나쁜 놈이니까 미안하다는 생각도 이제 그만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어머니가 말한 대로 그렇게 나쁜 놈인데, 나쁜 놈이 미안하단 생각을 할 리가 없겠죠.

나는 내가 우울증인가보다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고 그냥 배가 불러서 그랬나 봅니다.

무서워서 도망치고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내게 그런 도망은 용서되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더 멀리 도망갈 겁니다.

나는 나쁜 놈이니까요.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두렵지 않아요.

거기에선 나에게 벌을 주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그동안 많은 조언과 격려를 주셨던 분들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여기에 이런 글을 남기는 것도 마지막이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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