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키니-코피팡 소동.

2012.02.09 03:10

lyh1999 조회 수:2680

솔직히 저도 이 논란이 지겹습니다. 얼른 빨리 후딱 마무리되고 평화가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올리는 글입니다.

밑의 arcana 님 글을 보고 살짝 용기를 내봤습니다. 개인 블로그에 썼던 거라 반말입니다. 이 점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논의를 살펴보면 대부분 비키니 사진을 찍어서 보내고 올린 행위가 아니라 나꼼수 일당(?)의 발언이 문제라고 전제를 잡고 있는 듯하다. '삼국카페'의 성명에도 '비키니 사건'이 아니고 '코피 발언 사건'으로 불러야 한다는 언급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각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의 발단이 된 사진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

문제는 이 비키니 사진만을 놓고 봤을 때 이 이미지 자체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무슨 메시지를 의도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점이다. 굳이 유추하자면 "비키니 응원" 내지는 "비키니 시위" 정도의 의의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데, 그래도 BBK-정봉주 사건에서 성적 코드가 개입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이 두 가지가 무슨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도무지 명확하게 해석되지 않는다. 그나마 비슷한 케이스를 떠올리자면 월드컵 때마다 등장하는 응원녀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성적대상화" 같은 비난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인데, 사실 BBK가 월드컵 같은 축제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 여성이 외국에서 종종 벌어지는 나체 시위의 전통을 도입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슬럿워크(잡년행진)처럼 여성의 헐벗은(?) 패션이 등장해야 할 명분이 명확했던 케이스와 비교해본다면, 여기서 비키니는 그냥 난데없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나는 비키니 사진을 찍은 당사자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별을 막론하고 그런 사진을 찍을 권리야 누구나 갖고 있다. 다만 이 사진은 BBK-정봉주라는 컨텍스트와 다분히 거리가 먼 그냥 "질이 낮은 이미지"라는 것이다. 나꼼수 식의 유머를 의도한 것이라고 해도 별로 웃기지가 않는다. 다시 말해, 솔직히, 이게 어디가 웃긴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애초에 방송에서 언급할 정도로 잘 만든 응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볼 때 이번 소동과 가장 유사한 케이스는 임재범의 나치 제복 퍼포먼스 논란일 것이다. 임재범은 당시 나치즘에 반대하는 의미로 제복을 입고 나온 것이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그 변명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그냥 제복이 멋있어서 좋아할 뿐이라는 설명이 차라리 더 그럴듯하다. 당시 진중권은 이를 두고 '공연윤리'보다 '공연미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그 퍼포먼스를 그냥 "구린 미감"이라고 논평했었다. 잠시 그의 칼럼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보도 자료를 통해 이른바 ‘해명’을 했다. 아니, 그 이전에 무대의 대사와 노래의 가사를 통해 자신의 복장이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오해’의 소지를 미리 철저히 없애두었다. 구차하게 변명이나 해명을 늘어놓지 않고, 그냥 대중의 오해를 과감히 허용하고, 그들의 비난을 용감히 감수했다면, 비록 뒷북이긴 하지만, 그의 ‘도발’이 정말 ‘도발’이 될 뻔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안전운행을 택했고, 그 결과 그의 퍼포먼스는 한낱 구닥다리 코스프레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나치 코스프레의 ‘구린 미감’" 중에서)

나꼼수의 대응은 임재범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다. 이 사진이 그냥 "구린 미감"의 산물에 가깝다는 걸 그들이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방송에서 언급하며 낄낄댔고, 그 언급에 정색하고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등장하자 어쩔 줄 모르고 우물쭈물댔다. 그들은 어쩌면 정말 그 와중에 맥락과 상관없이 예쁜 몸매만 보면 환장하는 남성성의 폐해를 드러낸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 사진을 어떻게든 '개그'로 해석해야 한다는 위트의 강박이다. <나는 꼼수다> 방송의 알파와 오메가를 규정하는 정서는 진지한 저항이 아니라 실실 쪼개는 유머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 사진을 개그로 억지춘향을 부린다고 가정했을 때 누구라도 정봉주의 성욕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는가?

나는 지금 나꼼수를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나꼼수와 이 사진을 보고 불쾌해하는 비판자들의 결정적인 오판은 바로 이 위트의 문제를 다루는 태도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개그는 그냥 개그일 뿐 그냥 웃어넘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구호가 통하는 건 오직 유재석과 박명수가 꾸린 상황극의 세계뿐이다.) 그러나 진심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개그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나꼼수의 풍자가 먹혔던 건 그 진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사진은 그냥 웃고 넘기자? 그런 걸 바로 이율배반적 태도라고 한다. 비키니-코피팡 '드립'을 그렇게 넘겨버리면 우리는 이들의 '각하 헌정'에 담긴 '충정'을 농담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반박도 할 수 없게 된다.

한편 나꼼수의 발언을 문제삼는 사람들의 대응이 효과적이었다고도 보기 어렵다. 이들의 항의는 지금껏 나꼼수가 은연중에 '쿨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한 구시대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나꼼수 멤버들의 성 인식이 80년대 운동권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삼국카페' 회원들이 발표했다는 성명은 80년대 운동권의 행동방식과 뭐가 다른가? 저급 개그에 정색하고 비분강개하는 순간 비판자들은 그냥 우스워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위트와 쿨함을 중요시하는 나꼼수로서는 이런 '구린 미감'의 대응에는 어떻게 맞대응해야 할지 모르고 허둥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나꼼수 편을 드는 사람들은 쨍알거리면서 따지기 좋아하는 페미니스트의 (어긋난) 스테레오타입을 들이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판자들은 최소한 좀더 '센스'를 발휘했어야 했다.

결론. 이 소동은 성 인식이나 윤리의 옳고 그름의 차원에 있지 않다. 비키니 사진과 '코피 팡' 발언의 논란이 이 정도로 오래 가거나 커질 성격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소동은 차라리 쌍방간의 소통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유머, 위트, 쿨함 등으로 표상되는 미적 감각의 문제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게 다 끝까지 어설프게 멋있는 척하려다 벌어진 비극인 셈이다.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이 비웃음을 들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덧. 그러니까 김어준이 이 소동으로 입은 가장 큰 데미지는 그의 미감이란 게 결국 비키니 사진 같은 별 시덥지 않은 개그에 파안대소하는 유치한 수준이란 걸 들켜버렸다는 것이다. '서울 메이트'의 단편적인 유행어 따위에 열광하는 초등학생의 마인드가 여전히 그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솔직한 언행을 선호하므로 이 점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유치함과 솔직함의 결합이 김어준의 매력이지만, 동시에 지금 사람들이 나꼼수를 떠나는 가장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나꼼수 일당은 과연 이 점을 깨닫고 있을런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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