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有] <멜랑콜리아>를 보고.

2012.05.27 23:02

우잘라 조회 수:2086

이거 원래 블로그에 올리려고 적은 글이라 어투고 뭐고 다 무척이나 오그리토그리(ㅜㅡ)해서 부끄럽지만...

 

어제 듀게에 올리겠다고 했으니까 올려볼게요... 이 영화 본 게 듀게 덕분이라서...

 

아, 부끄러워라(...)

 

 

 

 

 

=====

 

 

 

 

 

*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2012년 5월 26일 20시 50분. CGV 상암 5관에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를 봤다.

라스 폰 트리에.

나는 영화에 그리 해박하진 않다. 그렇지만 그의 이름은 익숙했다. 아마 듀게에서 스쳐지나가며 그의 이름을 접했던 게 아닌가 싶

다. 그의 특이한 이름 덕분에 기억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름 이외엔 아는 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감독이었다. 알고 있

는 거라곤 영화를 좀 잘 아는 사람들에겐 유명한 감독인 듯하단 것과 <안티 크라이스트>란 제목의 영화를 찍었단 것. 그런데 그 <

안티 크라이스트>란 영화를 심야방송에서 잠깐 봤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멜랑콜리아>를 보기 전, 감독에 관해서 잠시

검색해보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그 영화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 감독에 대해서 그만큼이나 몰랐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 영화를 보게 될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영화관에서 영화 시작하기 전에 나올 때 봤던 잠깐의 예고편과 '우울

증'이라는 제목도 흥미를 자극했지만, 듀게에서 사람들이 남긴 감상평을 보고 난 뒤에 이 영화를 봐야겠구나, 하고 결심했던 것 같

다. 특히나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서 구토를 하고야 말았다는 누군가의 후기가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

기도 했을 것이다. 어떤 영화일까, 싶은 마음.

그리고 어쩌면 일종의 자기학대욕구, 였을지도 모른다. 최근 나는 영화를 거의 혼자서 보고 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르마딜로>나 <화차>를 보고나서 몰려오던 시린 외로움과 우울감이 몸서리치게 무섭고 싫었던 한편

으로, 그런 걸 맛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이 영화가 보고 싶어졌던 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 와서 되짚어보자면, 여러모로 코웃음이 쳐지면서도 결과적으론 내가 내렸던 몇 안되는 탁월한 선택이었

다. 지금까지 거대한 스크린과 몸을 울리는 음량, 그리고 스크린을 제외한 모든 것을 뒤덮어버리는 어둠 속에서 영화 밖의 세상을

모두 잊어버린 채로 영화에 몰두 할 수 있기 때문에, ㅡ즉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게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던 영화가 딱

한 편 있었다. 2010년 과천 SF 영화제에서 봤던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그 한 편이었다. 그 영화를 보고난

뒤 집에서 노트북으로 다시 한 번 봤을 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다행이다. 그리고 <멜랑콜리아>의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 나는

이제 그런 영화가 두 편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멜랑콜리아>는 내게 그런 의미의 영화가 되었다.

영화는 일종의 프롤로그랄 수 있을 첫 십여분의 장면과 1막 저스틴(Part One Justine), 2막 클레어(Part Two Claire)의 두 장으로

나눠진다. 각각의 장의 이름은 영화의 중심이 되는 두 자매의 이름이다. 그리고 제목인 <멜랑콜리아>는 어느날 갑자기 지구를 향해

급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거대한 행성의 이름.

프롤로그 부분을 보면서 대체 이건 무슨 영화인가, 싶었다. 말로만 듣던 예술영화가 이런 건가. 앞으로 2시간 동안 이런 걸 계속 보

게 되는 건가. 대체 보면서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벙찐 채로 스크린을 멍하니 바라봤다. ㅡ그렇지만 끝부분에 가서

야 바로 이 프롤로그의 장면들이 상징하던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장면을 다시 곱씹어 보기

위해 영화를 다시 보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 앞부분의 아리송함에도 불구하고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헉, 소리가 절로 나오던 충돌. 그 장면이 던져주는 두근거림과 함께 1막의 장이 열린다.

첫장을 보면서는 토해버릴 것만 같은 메스꺼움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아마 무엇보다 화면을 찍는 카메라의 기법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정확하게 뭔진 잘 모르겠지만, 처음 몇십분 동안은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요즘 영화관에 들어갈 때 팝콘과 콜라는 가격

이 부담되기도 하고, 이런 영화에는 별로 안어울릴 것 같아서 아이스티만 하나 사서 들어가는데 다행히도 도움이 좀 되었다. 그렇게

화면에 적응을 마치면서 서서히 펼쳐지는 이야기와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의 연기에 빨려들어가며 다른 종류의 메스꺼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왠지 모르게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고. 주변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그의 미묘한 반응들이 몸서리 쳐지게 와닿으면서, 안타까움의 탄성을 소리없이 내지르던게 몇번이었는지. 총을 장전하는 일련의 동

작들처럼 하나하나 쌓여가기 시작하는 사건들이 끝내 방아쇠를 당기듯 찰칵, 탕, 하고 '발사'되어버리는 그. 나는 그저 엄지손가락

이나 깨물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앞의 텅 빈 시트에 머리를 쳐박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마치 죽기 직전, 토리노에

서 말을 끌어안고 울부짖던 니체와도 같았다면, ㅡ과장이겠지만. 어쨌든 그런 끝에 그는 결국 파국을 맞이한다. 마치 이제 찾아

올 종말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처럼...

2막은 산산이 부서져내린 저스틴의 모습과 함께 시작된다. 서서히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푸른 빛의 멜랑콜리아는 그의 우울(Blue)

를 상징하듯, (이건 프롤로그 장면에서 세 사람이 나란히 서있을 때 또한 그러했다) 처연하게 빛난다. 종말을 위한 준비가 1막에서

모두 끝났기 때문에, 이제 2막을 채우기 시작하는 건 종말로 가는 차근한 발걸음이다. 멜랑콜리아의 예상궤도는 지구를 집어삼킨

다. 클레어의 남편은 아마 과학자인 것 같고, 다가오는 멜랑콜리아에 불안해하는 클레어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럼으로써 스

스로도 안심하기 위해) 그를 계속해서 다독인다. 그러나 부정하고 싶었던 종말이 더 이상은 뒷걸음질도 치지 못할만큼 확연해지자,

그는 클레어가 준비해두었던 약을 삼키고 마굿간에서 자살함으로써 종말의 순간에서 달아난다. 멸망 앞에서 이성은 그렇게 자살하

고, 남게 된 것은 우울증 환자와 겁에 질린 어머니와 아이. 클레어는 아이를 데리고 잠시 발버둥을 쳐보지만 헛될 뿐이다. 콩의 갯수

를 맞추면서 전지성을 보여줬던 저스틴은 (이게 좀 의문의 여지가 남는 부분이기도 한데... 앞서 말했던 총의 비유가 적절한 설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다가오는 두려움에 흐느끼는 클레어를 소름끼치게 조소한다. 그렇지만 한

편으론 나 또한 저스틴의 모든 말에 동감이 갔다. 이젠 대사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결국 그렇지 아니한가. Earth is evil, 이라고 했

던가. 삶은 그 꿈틀거림만큼이나 징그러우면서 아름다운 것. Evil은 적절한 설명인 것 같다. 그러나 저스틴은 다가올 종말을 깨닫고

담담하게 두려움에 떠는 아이를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안심시켜 준다. 그리고 그들이 초록 들판 위에 세운 '동굴'은 소름끼칠만

큼 애처로웠다. 죽음 앞에 선 우리의 모든 것을 상징하듯.

멜랑콜리아가 스크린을 덮쳐오는 마지막 장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스타게이트 장면에서 처음으로 일종의 전율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 후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전율 덕분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그렇게 소중한

기억으로 품고 있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전율만큼이나, 아니,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감각이, 시각과 청

각을 덮쳐올 때 내 심장은 정말 미친 듯이 쿵쾅거렸고 온몸은 바들바들 떨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시트 위에 앉은 채로 나는 이

런 생각을 했다. 스크린 밖의 세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하고. 정말 다행이었다.

이런 영화야말로 아이맥스로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바타> 같은 기술력보다 중요하면서도, 한 차원 높은 무언가의 세상을

맛본 느낌. 앞으로 할리우드 스펙터클이 코웃음쳐지진 않을까하는 걱정이 살풋 들기도 한다. 종말, 멸망에 관해서 지금까지 내가 본

그 어떠한 작품들보다도 '현실적'이면서 '완벽'했던 작품이었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지. 라스 폰 트리에. 정말

대단한 감독인 것 같다. 다른 작품들도 머지않아 찾아보게 될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 그렇게 뒤흔들려버렸기 때문인지 돌아오던 지하철에서 고생을 좀 했다. 난 듀게에 짧은 글을 남기며 매달리듯 손잡

이를 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전율은 지진이 지나간 후에 찾아오는 여진처럼 다음 날 아침에도 나를 괴롭혔다. 내가 찬

찬히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게 만든 건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자니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 영화는 섹스 같았다고. 클라이막스 전까지는 전희(前喜), 클라이막스는 오르가즘, 그리고 지금 이건 후희(後喜)인 거라고. 낄낄

웃었다. 이영도 작가의 팬들이라면 이해할 법한 비유를 해볼까.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나는 레누카 만난 수수깨비 같았고, 저스틴의

모습은 미와 벨로린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리무진에서 웨딩 드레스를 입고 있던 그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커스틴 던스트는 무

척 아름다웠다. 그가 나온 다른 작품들도 한 번 보고 싶어진다.

지금 적어본 것보단 더 많은 것들을 느꼈던 것 같은데, 일단 적어볼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인 듯하다. 스크린에서 내려가기 전에 꼭

한 번쯤은, 다시 보고 싶다. 가급적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별 수 없겠지. 영화를 보고나서 지하철역으로 가던 길, 밤바람을

맞고 있자니 떠올랐던 그 사람에게, 영화를 보고나서 몰려왔던 무시무시함에 떨면서 멸망의 순간 앞에서 가장 연락하고 싶었던 그

사람에게 연락할 수 없단 건 퍽이나 슬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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