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읽은 '대지' 다시 읽기.

2012.07.05 17:19

푸른나무 조회 수:2606

 개인차가 있겠지만 옛날에 읽었던 글을 다시 읽게 되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단편이면 몰라도 혹은 읽고 나서 거푸 읽는 경우가 있긴 있어도, 시차를 두고 예컨대 십년도 지나 많은 분량의 책을 다시 읽기란 참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책을 읽게 되면 새롭게 와닿거나 느낌이 참 많이 달라지죠. 예전에 영화 '쉘부르의 우산'이 그랬던 것 같아요. 그 영화를 세 번 봤는데 처음엔 아주 어려서 봤는데 참 좋았다가, 두 번째 좀 커서 봤을 땐 몹시 싫었고 세 번 봤을 때도 여전히 싫었어요. 그 영화를 몹시 좋아하던 교수님이 감상문을 써내라 그랬는데 엄청 싫다는 감정을 그대로 실어 넣어서 그랬을 리는 없고 시험을 잘 못 봐 아무튼 그 과목 성적이 재수강을 해도 별로여서 결국 포기했던 싫은 기억도 있어요. 네 번을 보면 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또 보게 될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도 어린이용으로 읽었다가 다시 읽었던 적이 있는 작품인데 모를 때나 알 때나 참 재미있더군요. 강렬한 작품은 알고 읽든 모르고 읽든 기억에 강하게 남는 것 같아요. 그렇게 가끔 생각이 나서 읽게 되는 게 아니라 우연히 다시 읽게 되는 경우의 책이 있죠.

 우연히 커피를 마시러 갔다가 까페에 있길래, 카푸치노를 마시며 그렇게 짚어든 책이 펄 벅의 '대지'였는데 재미있었어요. 기억이 제대로 날까 싶었는데 읽다보니 기억이 나더군요. 결혼을 앞둔 아침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도 읽다 보니 그랬었다 생각이 났어요. 왕룽의 결혼날 아침, 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깨어 목욕을 하고, 차를 끓이는데 헤프게 차를 집어넣었다고 꾸중 듣는 거 하며 결혼식날이니 괜찮다며 응수하곤 아침 식사를 하고 이제는 아내가 생겨 이렇게 아침을 직접 차리는 일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는 왕룽을 읽었어요. 이발을 하고 고기를 사고 그리고 오란을 데리러 가 부잣집에서 절절 매며 기가 죽는 것까지. 커피를 홀짝이면서 읽다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아쉬웠습니다.

 다음에 가서는 왕룽의 첫날밤 이야기, 전족을 하지 않아 발이 컸고 생긴 건 보통이고 말이 별로 없는 오란이 밤에 옷 아래에선 부드럽고 매끄러운 피부를 숨기고 있었다는 문장과 왕룽의 집에 와서 없는 살림을 알뜰하게 살고 첫 아이를 혼자 낳고, 또 첫 아이가 돌이 되었을 때 옷을 잘 입히고 못 보던 음식을 해서 종 살던 부잣집에 인사드리러 가는 이야기와 왕룽이 땅을 사는 이야기까지. 그리고 흉년이 있을텐데, 기억이 났어요. 땅을 아주 많이 사서 부자가 됐던 것도 같은데 그즈음의 왕룽이 변했던 것도 같고, 오란이 좀 불쌍했던 것도 같은데 아직까지는 많이 남았다 싶었죠..

 

 가뭄이 시작돼 밭에 뿌릴 물도 말라 경작을 포기하고 집안에 식량이 떨어지고, 그리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배를 곯는데 작은 숙부가 이웃에 왕룽이 곡식을 숨겨두고 배부르게 먹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해 사람들이 쳐들어와 집안 살림을 가져가는 것하며 이상하게 피둥피둥 살이 찐 숙부의 이야기, 마을에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이 도는 것과 오란이 딸을 낳았는데 갓난 아기가 죽고 왕룽이 내다 묻을 때 아이의 목 둘레에 두 자국이 나 있던 것과 아무리 쫓아도 달아나지 않는 배고픈 개를 두고 왕룽이 이제는 모르겠다며 흐느끼며 일어나는 것까지.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심상한 문장으로 처리했는데, 다시 읽는 저는 앗 이랬던가 하고 놀랐어요. 신은 한번 버린 사람들은 좀처럼 다시 돌아보지 않는 모양이다, 였던가 멋진 문장도 가만히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죠.. 

 잠깐씩 읽어서인지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그래서 집에 있는 책을 다시 보내달라고 했더니 엄마가 없대요. 그럴리가 없을텐데 싶지만 없다고 하시니 새로 사야겠어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어땠더라, 기억이 안 나서 새로 읽긴 읽어야 할 것 같아요..


 기억에 남은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과 그 문장을 다시 읽어내리는 일은 참 다른 것 같아요. 비가 많이 오더니 이제 잦아들었네요. 근래 소소한 즐거움이라곤 이것 뿐이었던 것 같아요...늦은 저녁 길을 걸어 자주 가는 까페에서 카푸치노 마시면서 '대지'를 조금씩 읽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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