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야그] 왕따의 아주아주 오랜 역사

2012.08.03 21:28

LH 조회 수:4055

 

90년대 후반의 신문을 뒤적여보니, 일본의 이지메(괴롭힘)를 소개하면서 자살에까지 이르는 학생도 있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다, 잠깐 안 놀아주는 정도지... 라며 근거 없는 우월감을 드러내는 기사가 있더군요. 에이, 그럴리가. 제가 어릴 때 바로 그런 괴롭힘 때문에 학교 옥상에 투신한 애가 있었는 걸요. 집단 안에 어떤 사람 하나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일은 사실 인간의 기본 속성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단히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일입니다만, 일단 여기에서는 신참을 괴롭히는 내용에 주목해서 살펴보지요.

괴롭힌다고는 말은 했지만 어떻게 보면 통과의례였지요.

한 개인이 단체에 들어오기까지, 한 번에 쫘악~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섞여들어가면 차암 좋지만 그렇지는 않은 법입니다. '어울리기'까지의 과정. 글고 그걸 어떤 의식/시련을 통과하게 하는 거지요. 어른이 되려면 저기 들판에 가서 짐승 하나 잡아오라는 성인식도 어쩜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짐승들도 처음 만나면 마운팅으로 서열을 정하기도 하고.

 

이런 것을 꼭 나쁘다고 보기도 뭐한 게... 바로 이런 의식, 의례를 통해 같은 집단 내에서는 동질감을 키우고 하나의 집단으로 공고해지거든요. 물론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런 의식이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지나치게 가학적으로 흐르면서 문제가 벌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 학생/관리들의 통과의례는 2단계로 나눠지는데, 우선 허참례(許參禮)가 있고 그 다음이 면신례(兔新禮)입니다. 허참례는 안면트고 같이 좀 놀아주기 시작하는 것이고, 면신례는 신참을 면한다는 뜻이니, 본격적인 신고식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면신이 끝나야 신참은 고참들과 같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이의 기간은 짧으면 며칠- 이후에는 2달. 두 달동안 신참은 꿔다놓은 보릿자로 신세로 끼지도 앉지도 못한다는 거지요.

 

이런 신고식은 고려 말기에 권문세족의 콧대높은 자식들이 처음 관리가 되었을 때 그 기세를 꺾으려고 시작했다 합니다만... 뭐 그게 아니더라도 신입신고식은 어떻게든 있었겠지요.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광범위하게 퍼져 성균관, 승문원, 예문관 등등 각 부서별로 모두 특색있게 치러졌고, 강도는 점점 더 심해졌지요. 이렇게 당한 신참들은 자신이 고참이 되었을 때 폐단을 끊기는 커녕... 새로 들어오는 신참들을 더욱 혹독히 다루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지요.

이런 신참 신고식은 고참들이 신참을 이거저거 냠냠 뜯어먹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소화 잘 되는 고기를 종류별로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내라, 라는 정도는 정말 양반이었습니다. 욕을 퍼붓고 이름을 막 부른다던가, 얼굴에 똥이나 오물을 바르게 하고 미친 여자의 소변을 먹게 한다거나. 심지어는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도 했지요. 어느 신고식에서는 사람을 거꾸로 매달고 발바닥을 때려서 으악 으악 비명이 얼마나 컸는지, 구중궁궐의 임금님이 듣고 "이 뭥미?" 했던 사건마저 있었습니다. 가장 심할 때는, 사람이 죽기까지 했지요.

 

그렇지만 면신례를 잘 치르는 게 바로 앞으로의 스무스한 관직생활을 위해서 꼭 필요했으니, 신참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면신례 한 번을 위해 땅 팔고 집 팔고 소 잡고(당시 소는 도살금지령이 있었...), 온갖 수모를 다 당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역사의 위인들 역시 이런 신참 의식의 피해자였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조선왕조 지정 왕따, 율곡 이이입니다.
그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장원급제를 했던 천재였지만,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맞이하여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중이 되었다고 하고 안 되었다고도 하고. 암튼 그 일탈로 평생은 물론 죽어서까지 까였지요. 성균관에 입학했다가 학생회장 주도 하에 왕따를 당하고 중놈이라고 욕설을 들었지요. 그러나 그는 다른 누가 아닌 율곡 이이였습니다. 남들이 갈구건 말건 태연자약 포텐을 터트려 1564년 한 해 벌어진 6개의 과거 중 5개를 장원급제 클리어 하면서 9도장원공으로 등극. 화려하게 관직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만...............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신고식이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걸 치르려면 어마어마한 재력이 필요했고 집안 들어먹기 일쑤여습니다. 당시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돈 없고 빽 없고 있는 건 그저 실력 밖에 없었던 이이입니다. 게다가 성깔도... 뭐 무난한 타입은 아니었지요. 사실 이이만의 잘못이었겠습니까. 당시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 치고, 그리고 글공부 잠깐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건넛집 이 판관 댁 셋째아들은 과거에 9번 장원했다는 데 넌 왜 이모냥이냐."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았을 리 없는 법. 바로 그 모든 열폭과 자격지심의 근원인 사람이 제 발로 자기 밑에 신참으로 들어왔으니, 안 갈구고 배길 리 없었습니다. 선배 관료들은 마음껏 갈굼의 칼날을 휘둘렀고, 결국 면신례 때 공손하지 않았다고 쫓아냈다던가요. 그리하여 몇년 뒤 이이는 선조에게 "신참을 이렇게 괴롭힙니다." 라고 이를 박박 갈면서 사정을 알렸고 임금은 신참 괴롭히기 금지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고 이후로도 신고식은 계속 되었지요.

 

앉은 채 옆으로 게걸음을 하는 목민심서의 저자를 상상해 보십시오. 수리부엉이 울음소리를 내는(어떻게 우나?) 경세유표의 저자를 상상해 보십시오. 한밤중에 정조에게 불려나와 "너 언제 과거 붙을래?"라고 갈굼갈굼을 당해서 펑펑 울며 돌아갔던 총각은 기어코 급제를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선배들의 갈굼이었지요. 정약용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야 ㅠㅠ" 하며 쓴 편지가 남아있습니다.
게다가 임금 중에서 이렇게 신참 괴롭히는 짓에 동참한 얼빠진 사람도 있었으니, 바로 성종입니다. 이게 찔렸는지 나중에 신참 괴롭힘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말이지요.

 

이런 걸 보고 아, 괴롭히기는 우리나라의 유구하고 내력있는 전통이구나! 지금 이 시대에 되살려 자자손손 이어받자! ...나는 바보같은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지메라는 말일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학교에서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때리거나,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건은 심심찮게 있었습니다만. 본격적으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96년 서울의 고등학교에서 4명 정도의 그룹이 선천적 심장병을 앓는 친구를 1년동안 집단 폭행해온 사건이 드러나서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모범생'이었다던 가해자 4명은 소년원에 가게 되었고, 피해자 학생은 사건 이후에도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해 이민을 갔지요. 이 즈음부터 한국식 이지메, 왕따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그 전부터 있었지만 그제서야 '이런 게 있구나'하고 사회가 깨달았다는 느낌이어요.

 

그렇다고 옛날의 아이들이 마음이 착했다는 건 아니어요.  "너 쟤랑 놀지마."라는 말 정도야 언제나 오가는 거고. 지금 모 당 대표님을 하시고 있는 어떤 분은 자기소개 홈페이지에 갓 전학온 동급생을 "사천 기 흐린다!" 라며 학교에 오지 못하게 막았던 일을 '자랑스레' 적기도 했습니다. 이러다보니 전 인간의 사회에서 완전한 괴롭힘은 사라지지 않겠구나, 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문제는, 강도이지요. 통과의례나 신고식은, 신참이 우리 집단의 일부가 되면 끝납니다. 성인식도 마찬가지이지요.
하지만 집단괴롭힘은 피해자가 죽거나 떠나지 않는 한 끝나지 않아요. 피해자는 오며 가며 별 이유없이 툭툭 걷어차는 샌드백이 되고, 더구나 괴롭히는 방법들은 쓸데없이 잔인해지고 있습니다. 왕따를 주도하는 아이가 있고 그 아이가 나쁘다- 라고 하지만 방관하는 것도 나쁜 것 맞고요. 결국 이런 괴롭힘 자체에 무관심해지고 일상이 되어버려서 자신들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하는 지조차도 자각 못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정당화는 합니다. 90년대 설문조사를 보니 가장 큰 따돌림의 이유는 "잘난 척"이더군요. 그러니까 괴롭힘 당해도 싸다, 라고 피해자에게 원인을 돌리는 거지요. 문제는 그 강도가 점점 누가누가 더 잘 괴롭히나 경연대회를 벌이는 중이라는 거. 그리고 브레이크가 없다는 것.

 

그렇게 된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1999년도 신문기사를 보니 일본인 학자가 일본 내의 이지메가 늘어나는 이유를 두고 가족들 사이가 이전만큼 끈끈하지 못하고, 학업의 스트레스가 늘어나는 것을 원인으로 지목하더군요.
우리나라의 상황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듯 합니다. 확실히 스트레스가 늘었지만 이것을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러다보니 누군가를 괴롭히는 방법들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인 경험담으론 지방보다 서울아이들이 훨씬 각박했고 따돌림의 강도도 심했습니다. 그 옛날 그 때가 그랬으니, 요즘 아이들의 환경은 생지옥이겠죠. 아이들의 마음이 병들어가니 나오는 행동이 제대로일 리 없고요.

 

사실 저는 이런 따돌림이나 괴롭힘은 어느 정도는 인간 사회의 본성이며 완전한 박멸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법으로 막을 수 있고 처벌을 가할 수는 있지요. 하지만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정을 이해한다, 라는 건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봅니다. 집에서 자기 아내를 때리는 남자가 길에서 여친을 때리는 남자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거 마냥, 사람은 내 일과 내 일이 아닌 것에게 놀랄 만큼 훌륭하게 이중잣대를 적용하거든요. 그렇다면 가해자의 처벌보다도 피해자의 치유에 더 중점을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돌림은 자존심과 자아존중감을 저 아래 흙바닥에 처박는 경험인데, 가해자를 처벌하는 정도로 이게 돌아올 거 같진 않습니다. 만약 율곡 이이나 정약용이 지독한 신고식이나 왕따로 폐인이 되었다 봐요, 얼마나 아까워요.
설령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아닐지라도 사람은 저 나름으로 가치와 능력이 있는데 그대로 시들어 버리면 참 아깝지 않습니까.


졸린 채 쓰다보니 두서가 없습니다.


P.S : 그 옛날, 갓 서울로 전학온 절 괴롭힌 애들은 지금 뭐할까 모르겠습니다. 지금 다시 만난다면... 후후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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