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부제목을 보고 있자면 독자들은 "90년대의 사랑만 아날로그냐?"라는 불만을 제기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미리 밝혀두고 시작하건데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랑'에 대한 나름의 정의이며 그 이유를 서술한 것에 해당한다. 

그래, 대놓고 말해보자. 사랑은 그 자체로 아날로그의 결정적 산물이다. 디지털 시대인 현재에 사랑이 없었냐고 묻겠지만 이 시대에서의 사랑도 결국 최소한 남아있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에 의해 형성되고 이뤄진다. 그렇다면 그 아날로그적 감수성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이토록 청춘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만들었는가? 

최근 이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담아낸 두 편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공개됐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과 '건축학개론'이다. 사실 냉정하게 따지면 7, 80년대의 사랑도 아날로그적인 것일텐데 왜 유독 90년대의 이야기만 텍스트로 끌어들이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우선 그 이야기부터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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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날로그의 끝자락, 디지털의 등장

90년대에는 IT와 관련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벤처 붐이 일어났고 PC통신과 인터넷 보급이 활성화됐다. 하지만 그보다 가장 단적으로는 PC방이 생겨났고 '스타크래프트'가 PC방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DOS 운영체계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도 90년대인걸로 알고 있다. 

즉, 90년대는 아날로그의 끝과 디지털의 시작이 만나는 일종의 '과도기'다. 이 과도기적 문화는 젊은이들의 생활 속에 깊숙히 파고 들어 있었다. 워크맨과 MP3 사이에 아주 잠시 존재했던 휴대용 CDP가 있었고 삐삐라는 놀라운 무선통신기기가 등장하나 싶더니 시티폰이 등장하고 PCS가 등장하다가 휴대폰이 보편화된다. 

젊은이들은 디지털의 편리함으로 쉽게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되지만 한편 여전히 불편한 어느 한 대목 때문에 아날로그적 사랑을 하게 된다. 아날로그적 사랑의 가장 첫 번째 화두는 '그리움'과 '애틋함'이다. 애시당초 디지털과 멀리 지냈던 7, 80년대에는 멀리 지내는 것이 당연했기에 만남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기 힘들었다. 그때는 그 만남의 거리가 당연하게 느껴졌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디지털기기가 서서히 고개를 들자 우리는 더 넓고 다양한 만남을 쉽게 가질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그 만남은 여전히 힘들고 애틋하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그리워 할 수 있는 범위가 더욱 확장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90년대의 젊은이들은 디지털 시대를 반기는 한편 아날로그를 아쉬워하는 시기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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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은 오해를 먹고 커져간다

2012년의 만남은 여러모로 편리하다. 약속장소를 대충 잡고 핸드폰으로 계속 연락하면서 쉽게 만날 수 있고 화상통화로 보고 싶을때 언제든 얼굴을 본다. 모바일메신저는 정성들여 쓰던 손편지를 대신하게 됐고 몇번이고 쓰다 지우는 이메일도 대신하기 시작했다. 라디오 듣다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때 REC 버튼을 눌러 녹음하던 버릇은 MP3 파일 다운로드로 대신하게 됐고, 보고 싶은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게 됐다. 

디지털 시대는 세상을 참 좁아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만남을 참 편리하게 만들었다. 또 그만큼 그리움을 감소시켜 '오해'를 줄이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사랑의 오해가 그렇게 나쁜 것일까?

앞서 말한 두 텍스트, '응답하라1997'과 '건축학개론'은 모두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모두 '오해'로 인해 깊은 감정의 골을 만들어간다. 사실 스무살 청춘의 사랑이 그렇게 결실을 보기는 힘들다. 굳이 '오해'라는 무기를 꺼내지 않아도 그 철 모를 아이들이 사랑의 결실을 맺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때는 우리가 얼마나 순진했던가? 포르노테잎 하나 볼려고 시내 불법카세트테이프 자판 아저씨와 암묵적 거래를 하기도 하고 그렇게 확보한 것을 부모님 일 나가신 친구집에 모여서 방문 잠그고 숨죽여 볼 정도로 순진했다. 지금은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검색어만 치면 주르륵 찾을 수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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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응답하라1997'이나 '건축학개론' 모두 참 '90년대스러운' 연애담을 전면에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오해'에서 비롯되고 그 오해는 시간이 흐른 뒤 '후회'라는 결말을 낳게 된다. 오해와 후회는 모두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한다. 사랑을 하는데 있어 아파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 성장통을 겪어야 우리는 사람 귀한 줄 알게 되고 그들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어린 시절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러다 오해하고 헤어지고 후회하고 그리워하며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어른'으로 성장해왔다. 하지만 정작 어른이 된 우리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잊은채 살고 있다. 왜냐하면 어른이 되고 맞이한 세상은 디지털의 편리를 누리며 '그리움'을 잊게 만들고 오해와 후회를 줄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도 카카오톡 메시지 보내듯 편리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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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리함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

그러니깐 위에 쓴 복잡한 글을 짧게 요약하자면 "진짜 사랑은 그리움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는 편리함이 더해져 그리워 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진짜 사랑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응답하라1997'과 '건축학개론'을 보고 있자면 우리는 참 많은 것을 잊고 지냈었다. 그것을 우리는 두 작품 모두에서 중요한 텍스트로 등장하는 '가요'를 통해 알 수 있다. 

사실 90년대 후반은 H.O.T, 젝스키스 등 1세대 아이돌들이 막 등장해 가요계의 일반적인 흐름을 바꿔놓던 시기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신승훈, 김건모가 가요계를 찜쪄먹다가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해 판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아이돌'이라면 지금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기 아이돌이 부르던 노래와 지금 아이돌이 부르는 노래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노래'란 말 그대로 하나의 '시'(詩)다. 아름다운 노랫말에 멜로디를 실어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예술장르다. '건축학개론'에 중요한 텍스트로 등장하던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만 해도 공들여 쓴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로 당시 많은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울렸다. 또 '응답하라1997'에도 90년대의 많은 노래들이 등장한다. 물론 가장 많이 등장한 곡은 H.O.T와 젝스키스의 노래다. 사실 나 역시 90년대를 관통한 '아저씨'로('응답하라1997' 등장인물들의 연령대를 보니 걔네들이 전부 나랑 동갑이다. 1980년생.) 당시만 해도 아이돌의 노래 가사들이 그저 그래보였다. 헌데 지금 아이돌의 노래를 듣다가 생각해보니 당시 아이돌들의 가사가 참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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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나 '행복'같은 달작지근한 사랑노래를 부르던 H.O.T도 'We are the future', '늑대와 양', '아이야'같은 묵직한 노래들을 내놨다. 젝스키스는 뭐 데뷔곡부터가 '학원별곡'이다. 그러고보니 H.O.T도 데뷔곡이 '전사의 후예'다. 냉정하게 이들의 데뷔곡만 비교해보자. 두 곡 모두 입시에 찌들은 청소년들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후에도 이들의 노래는 사회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하면 10대들의 감수성을 건드리는 가사들로 채워내고 있다. 이후 등장한 G.O.D, 신화 등 아이돌들 역시 '가사'만큼은 심혈을 기울인 흔적을 보이고 있다.

가사를 써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적어도 노래 한 곡을 만들며 이들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들이 단순히 귀가 즐거운 것을 떠나 10대들의 마음을 얼마나 대변해주는지 알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아이돌'은 그냥 이쁘고 잘 생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우상'이라면 '우상'에 걸맞는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아이돌 그룹 내 왕따가 있다고 폭풍같은 비난을 퍼붓는 것은 말 그대로 그들이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우상에 대한 실망은 다른 실망보다 훨씬 크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상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이야기가 좀 샌 것 같다. 어쨌든 디지털 시대의 서운한 점 중 하나는 사람들이 노래를 귀하게 여길 줄 모른다는 것이다. 듣는 사람이나 만든 사람이나 부르는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우리 모두가 노래에 자신만의 사연을 담고 있었다. '건축학개론'만 해도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에 사연을 담은 두 남녀가 등장한다. 단순하게 말해 이성에게 차이고 집으로 가는 길 버스 라디오에서 들려온 노래가 가슴을 후벼판다면 그 곡도 사연이 담긴 노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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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감수성의 문제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이 가벼워지면서 듣는 사람 역시 노래에 사연을 담아낼 만큼 감동을 받지 못하게 됐다. 물론 여기에는 MP3를 통해 쉽게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점도 기여했다. 물론 90년대에도 레코드판은 있었지만 냉정하게 그 시기는 레코드판 닦아가며 듣던 시대가 아니니 접어두자. 그래도 용돈 차곡차곡 4500원짜리 카세트테이프나 12000원짜리 CD 사서 들으며 그것들 참 귀하게 관리하던 시기였다. 너무 오래 들어서 카세트테이프 늘어나면 속상해 했고 CD는 오늘날 제품처럼 별의 별 별책부록 안 들어있어도 참 귀하게 관리하던 물건이었다. CD에 기스날까봐 판 부분 못 잡고 손가락으로 양쪽 끄트머리 잡은채 CDP에 고이 얹어두고 들었다. 

노래를 귀하게 여기지 못하면서 우리의 감수성이 메마른건지, 아니면 감수성이 메말라 노래를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012년의 젊은이들은 90년대의 그들처럼 노래를 즐기지 못한다. 노래를 즐기는 것은 단순히 노래방가서 신나게 불러제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2012년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얼마나 거기에 빠져들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드는 사람부터 유통하는 사람, 듣는 사람까지 모두 노래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노래를 귀하게 여길 때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사회를 걱정하게 될 것이다. 

가끔 쓸데없는 걱정을 해본다. 앞으로 약 10여년쯤 흐른 뒤, 지금의 청춘들이 20대 후반에서 30대가 됐을 때 그들은 어떤 노래를 들으며 청춘을 추억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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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가장 조화로웠던 시기

이제 정리해보자. 아날로그의 시대가 종말을 맞이하던 90년대에는 80년대 이전의 감수성과 2000년대의 편리가 만나 꽤 재미난 광경을 여럿 연출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영화 '접속'과 같은 진풍경들이다. '응답하라1997'과 '건축학개론'은 바로 그 가장 이상적이었던 시기에 대한 그리움이다.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디지털에 녹아들며 아날로그로 디지털을 풀어갈 수 있는 시기였다. 

2012년이 되고 보니 사회나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수성 모두 디지털화 되어버렸다. 디지털 사회는 우리를 매우 편리하게 만들었고 또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했다. 그 사회의 속도에 우리는 허겁지겁 달려가며 겨우 쫓아가고 있다. 그리고 쫓아가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낙오자'로 찍히게 됐다. 

굳이 여유로웠던 시기를 추억하기 위해 90년대를 꺼낼 필요는 없다. 80년대에도 70년대에도 정치적 불안은 내재했지만 그 속에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누구보다 낭만적이고 여유로웠다. 적어도 지금 젊은이들보다는 말이다. 

사실 이 글의 결론을 낼 수는 없다. "그때는 이런 것이 좋았으니 그때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기에도 난처하다. 단 하루쯤 "세상에서 사라지자"는 마음으로 컴퓨터도 꺼버리고 핸드폰도 꺼버리자. 필자는 최근 자의반 타의반으로 핸드폰을 없앴다. 물론 부득이한 연락을 위해 와이파이는 사용하고 있지만 전화를 주고 받는 일은 거의 안 하고 있다. 며칠 됐는데 의외로 편한 점이 많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으로부터 도피지만 한결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있다. 90년대에는 삐삐만 있어도 약속잡고 사람만나고 다 했다. 


여담1) 내 첫사랑은 잘 지낼래나?

여담2) 짤방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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