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결혼이라..

2012.11.08 13:00

잠시익명할게요 조회 수:4579

비혼이고, 연애 중이고, 결혼은 하고 싶고 아이도 갖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마 하기 힘들 거란 예감이 들어요.

사랑과 신뢰, 원활한 의사소통, 원론적인 말은 하기 쉽죠. 그러나 그게 아주 현실적이고 구차한 문제로 넘어간다면요.


저는 결혼이나 출산 여부와 상관없이 일을 계속하고 싶고 기왕 일을 한다면 지금처럼 빡세게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보살피면서 만족을 얻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년간의 경험으로 미뤄볼 때 그건 저와 맞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다음에 일할 걸 생각하면 머리가 빽빽하게 복잡해져요.

얼마 전 뉴욕의 부촌 어퍼 이스트에서 유모가 오랜 시간 돌보던 아이 둘을 칼로 찔러 죽이고 본인을 자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방송사의 고위직이었고 어머니는 전문직이었다가 육아를 위해 전업 중이었구요.

저 끔찍한 사건에 한국 여성들이 모이는 사이트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그래서 왜 아이를 남에게 맡기냐는 것이었죠.

아이는 무조건 엄마가 길러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퍼져 있고

심지어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데 나가 일하는 엄마들은 이기적이라는 말도 들리는 게 현실입니다.

완모를 장려하고 아이에겐 면기저귀와 유기농 식품까지 최고만 챙겨주어야 한다는 압박이 유독 강한 게 한국에서 제 주변 현실이구요.

시간적 체력적으로 그만큼 챙겨줄 수 없는 직장엄마들에게 끊임없이 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부여하는 구조 같아요.

임신과 출산만으로도 커리어에 엄청난 손해가 가는데 그것도 모자라 아이가 자라는 내내 엄마 혼자 동동거리다 보면

직장에서는 태만하다고 찍히고 집에선 그깟 돈 얼마 번다고 애도 건사 못한다고 찍히고.

같이 낳아놓고 남편은 나가서 일하는 게 디폴트라서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맞벌이하면서 아이와 남편 밥 챙기는 여자들,

그러다가 내 애한테 못할 짓하느니 그만두고 들어앉자고 전업으로 돌아선 여자들이 제 주위에만도 여럿입니다.

선배들을 보면 아이가 어릴 땐 버티다가 아이가 학교에 가면서 전업엄마들과 정보력 싸움에서 뒤진다고 직장 그만두고 학원맘 되는 경우도 봤구요.


결혼 얘기가 꽤 진지하게 나왔던 전 애인들에게 제가 농담조로 요구했던 조건들이 있습니다.

명절마다 당신 집만 먼저 가면 딸만 있는 우리 부모님이 안됐지 않느냐, 명절마다 번갈아 가며 한 집씩 먼저 가자구요.

실제로 이걸 실행하는 경우를 가끔이지만 봤기 때문에 그렇게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네 부모 내 부모를 따진다는 말을 하기 전에 

명절마다 오후까지 자식들을 목빼고 기다려야 하는 여자 쪽 부모에 대한 동정심이 드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싶었구요.

격렬한 반대는 아니었지만 난색을 표하더군요. 격렬한 반대가 아니었던 이유는 그래 봐야 네가 결혼하면 뭘 어쩌겠냐 하는 자신감 같았구요.

그 다음 조건은 상대방의 손아래 형제들에게 아가씨, 도련님이란 말은 못 쓰겠다는 거였습니다.

내 형제들은 처형 처제인데 왜 현실세계에서 분명히 위계를 나타내는 용어로 쓰이는 존칭을 당신 손아래 형제들에게 해야 하느냐고.

지금 이미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이름에 누구씨를 붙이면 안되겠느냐고 했습니다.

역시 난색을 표하더군요.

남자가 집을 해가는 한국 결혼시장의 기형적 구조를 성토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게 설마 여자가 집에 팔려가니 남자 쪽을 우선해야 한다는 말은 아닐 테고

심지어 저는 제가 집을 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문제로 헤어진 것도 아니었고, 제게 동의해 주지 못했던 상대방 개인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압니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을 통해 결혼이 두 사람만의 결합이 아니란 것, 

서로의 이해와 양보라고 말은 좋지만 양보는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하는 것인데

결혼에서의 양보란 이미 이권을 쥐고 있는 쪽에서 나서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

가계에 대한 경제적 기여도와 상관없이 관습적인 압박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결혼이 손해거나 사기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각자의 사정에 맞춰 양보하고 합의하고 때로 체념하기도 하면서 둥글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는 것도 알죠.

그러나 적어도 제게 결혼이란 현실은 효용보다는 비용이 크게 보였고

지금은 사랑하고 신뢰하더라도 결혼 후에 일방적인 양보를 강요당하면서 애정이 식고 상대방을 비난하게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다른 여자를 만나면 마음 편하게 잘 살 수 있을 상대방들에게 순교자가 되길 요구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구요.


그래서 결혼을 하고 싶지만,  저란 개인에게 결혼은 너무 큰 도박이고 모험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래 jake 님의 글을 보고 아 그럴 법하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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