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출장 후기

2019.02.08 07:16

어디로갈까 조회 수:1253

1. 부당하게 여겨지는 성격의 출장이었습니다. 
괴로운 와중에도 흥미로운 진척이 있었는데, 그러나 의욕을 가지고 정신을 다잡노라면 제 안의 누군가가 어떤 한계를 가슴 아파하곤 했어요. '업무'의 본질은 '업보'인가보다 하며 근근이 버텼습니다. 

몹시 피곤한데 사흘 째 본격적인 잠이 안 오네요. 사실 출장이 아니더라도 모든 길은 피곤한 것이죠. 길이란 길 없는 자연에 대해 하나의 인위인 것이니까요.
돌아왔으나 제 집은 난방배관 공사로 폐허 상태인지라 부모님 댁에 얹혔습니다. (호텔로 가려했다가 가족에게 폭탄 비난을 받았...)
독립한 지 8 년이나 지났으나 옛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는 제 방에서 제 삶이 아니라 일반적인 삶, 삶 자체가 지니는 관성 같은 걸 느끼며 앉아 있어요. 공허한 충만 혹은 충만한 공허 속에 잠겨서.

2. 어제 Victoria Hotel에서의 새벽 한때.
몸은 흐물거리는데 잠이 오지 않아서 침대를 박차고 나가 무작정 호텔 안을 돌아다녔어요. 걷기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천천히 걷고 또 걷는 보선 중의 승려인 듯  마음이 텅 비워지더군요. 
그러다 걷기를 멈추고 로비 한구석에 앉아 사람들과 거리의 불빛들을 바라봤습니다. 어디로도 갈 필요 없이, 세상 모든 것과 일정한 거리 두고 있다는 -그러나  그 모두와  한 시대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  아득하고 편안한 느낌이 있었어요.

차들이 드문드문 오가는 거리의 불빛을 바라보노라니 점차 제가 정물이 되어가는 듯한 그 고요한 평화로움이 그저 좋았습니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프론트 직원이 다가와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도와드릴까요?" 묻더군요. "아니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또 제게로 와 따뜻한 물 한잔을 내려 놓으며 제 눈 속을 탐색하는 몸짓으로 "당신, 괜찮아요?" 진정어린 근심을 표했습니다. 
"저, 한 시간만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요. 좀 이상해 보이나요?"
그는 다행히 "오오..." 미소짓더니 정중한 밤인사를 건네고 물러나 주었습니다. 석상처럼 굳은 채 숨조차 죽이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앉아 있고 싶었으나 그에게 건넨 약속 땜에 한 시간을 넘길 수는 없었...

3. 그저께 저녁무렵. 업무도 무사히 끝나고 곧 떠날 터라, 호텔로 돌아오기 싫어 각국 말이 뒤섞여 시끄럽기 짝이 없는 NDSM 카페 한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어요.
근데 웨이터가 주문하지도 않은 청록빛 칵테일 한잔을 가져다 주는 게 아니겠어요? 확인해 보니 옆 테이블의 남자가 보낸 선물이었습니다.
제게 보낸 것이라기 보다는 읽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Ulla Hahn 울라 한'의 시집에게 보낸 호감이었어요. 대화해 보니 저보다 한문을 많이 알고 있던, 어딘지 고행승 같은 맑음이 있던 독일 뮌스터 출신 미하엘.  
(그가 요즘 가장 관심을 갖고 있다던 'Rufmord 중상모략'이란 개념에 대해 저도 글로 한번 풀어보고 싶...)

4. 사흘 전. 이번 출장 중 저를 써포트해준 카를로의 집으로 저녁초대를 받아 갔습니다. 
풍광 좋은 Vondelpark 근처 소박한 집이었는데, 모던한 외양과는 달리 실내는 중세 풍으로 고아하게 꾸며진 대저택 느낌이었어요. 특히 시간이 발효시킨 듯한 신비하고 다양한 색채의 벽면들이 이채롭더군요.
모델 출신인 예쁜 아내와 인형처럼 앙증맞은 어린 딸, 그리고 그의 친구 세 사람과 떠들썩한 저녁 시간을 보냈습니다. 
집안 어디를 가든 코끝에 감도는 씨프레 향 때문에 묘한 멀미 기운 같은 게 있었지만, 매운 맛이 도는 토마토즙과 함께 마신 데킬라의 취기가 보호막이 되어주어서 견딜 만했어요. 
어느 순간 BTS의 작년 시월 암스테르담 공연이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는데, 좌석의 세 명이나 다녀왔대서 좀 놀랐습니다.  한국에서의 그들 위상이 어떠냐는 질문에 '그저 그렇다'고 시크하게 답했더니 다들 뜻밖이네~ 라는 반응을 보여서 속으로 뜨끔했어요. ㅎ

대단치 않은 화제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웃고, 눈빛을 반짝이며 얘기를 만들어 내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거나 아이처럼 천진스런 괴성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그 다정한 소음을 고스란히 지닌 채, 저는 때때로 대단치 않은 공허에 붙들려 말을 잃어버리곤 했어요. 
그런 게 이방인이 갖는 황황함이었을까요. 그들과 저 사이엔 분명 정서적 거리감이 '밤의 강'처럼 은밀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꿈결같은 시간이었어요.

5. '추억할 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지나온 장소에 도달한 것'이라는 묘한 말이 기억납니다. 
글쎄, 그런 것일까요?  서울로 돌아와서야 그곳에서 제가 무한히 열린 마음으로 횃불 같은 행위들을 짓고 허물었음을 절감합니다.
정신은 체험하는 동안 자각되지 않는 법이죠. 행동하는 정신은 그 자신을 대상 속에서 확인하기 때문에 자신의 경계를 자기 안에서는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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