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분 어묵

2020.01.13 16:01

은밀한 생 조회 수:895

편의점 냉장 코너에 보면 한두개쯤 꼭 진열돼있는 그거예요.
전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 즉석식품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요, 이게 맛있는 척을 하는 맛없음이라 그래요. 특히 겨울 찬 바람에 시달린 상태에서 한 입 털어 넣는 그것들은 그 뜨끈함에 일단 감탄은 하고 보거든요. 이후로 음식이 점점 식어갈수록 여러 가지 첨가물의 어지러운 냄새와 즉석식품 용기의 역한 냄새 같은 것들이 풍기기 시작하면, 아 내가 대체 뭘 처먹었나 현타가 오죠. 맛없을 거면 첨부터 맛없든가..... 전자레인지에다 데운 즉석식품을 한 입 먹었을 땐 언제나 오 의외로 괜찮은데? 속고 만단 말예요.

하지만 그런 즉석식품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맛있는 게 있는데요 바로 3분 어묵이에요. 어차피 어묵이란 거 자체가 길거리에서 먹든 수제어묵 전문점에서 먹든 고급 일식집에서 먹든, 생선을 갈아서 이런저런 첨가물을 넣고 만든 것이니까 기본적으로 재료 본연의 맛 어쩌고 하는 기대가 없는 음식이기도 하고. 추운 겨울에 호호 불면서 먹는 그 맛은 대체로 마지막까지 실망을 주지 않죠. 어묵을 한 대접 먹진 않으니까. 보통 한두 개나 좀 많다 싶음 세 개 네 개에서 멈추죠.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용기 안에 어묵이 대여섯개 들어 있고 곤약묵도 한 개 들어 있는 구성인데, 제가 3분 어묵을 좋아하는 건 또다른 이유가 있어요.

이 삼분 어묵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한입 들이키면,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나는 장면이 있죠.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저보다 10살이 많은 큰언니가 박물관에 데리고 간 적이 있어요. 당시 저는 엄마가 해주는 밥이나 튀김과 도넛, 동네 제과점에서 파는 빵이나 핫도그 같은 게 인생 주식과 간식의 전부였던 시절이었죠. 제가 어려서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에는 편의점도 없었고 전자레인지도 집집마다 있질 않았어요. 겨울방학의 시작쯤에 박물관을 갔으니 아마 12월이었을 거예요. 흐린 날이었는데 축축하고 차가운 날씨였어요. 언니가 친구도 한 명 데리고 오라 해서 나의 양지바른 언덕도 데리고 갔었죠. 싱글벙글 두리번대던 친구랑 박물관을 둘러보고 로비 라운지에 잠시 앉아 있으라고 하더니. 안 그래도 좀 춥고 출출하던 참에 큰언니가 들고 온 삼분 어묵은 진짜 신세계였어요. 일단 전자레인지란 거에 데워서 나온 그 동그란 용기도 너무 신기했고, 뜨겁다면서 얼른 내려놓는 언니의 손동작도 신기했고, 뚜껑 비닐 포장을 북 뜯는 것도 신기했고. 언니가 먹자!! 하는 순간 한 입 들이키고 친구랑 나랑 “우와 언니 이거 뭐야” 했던 그날의 신기하고 따뜻한 기분이. 삼분 어묵을 먹을 때마다 그대로 살아나곤 해요. 정말 맜있게 먹었거든요. 마치 현대 최첨단 문명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어요.

난생처음 구경하는 드넓은 박물관의 풍경과 짙게 흐린 하늘. 금방이라도 눈이 올 것 같았지만 눈은 내리지 않았고 입고 있는 옷이 꼭 차가운 비닐을 뒤집어쓴 것 같단 기분이 들던 그날. 나의 양지바른 언덕이 연신 신나서 어머 저것 봐라 어머 얘 이것 봐라 하던 목소리가 갑자기 멀게만 느껴지고 신기하고 종종 웃었지만 이상하게 울적했던 그날. 언니가 데워온 삼분 어묵의 따뜻함이 참 좋았어요. 처음 보는 즉석식품이었지만 그걸 데울 수 있는 전자레인지 같은 기계가 있단 게 낯설었지만, 어쩐지 편안했거든요.

길거리 포장마차에 서서 어묵을 먹는 걸 좋아하질 않는지라 요즘도 가끔 목이 따갑거나 뭔가 겨울바람에 몸이 잔뜩 움츠러들고 배가 고픈 건 아닌데 그렇다고 차 한잔 같은 걸로 채워지지 않는 한기가 돌 때, 편의점에 들러 삼분 어묵을 사서 집에 가곤 하는데요. 세월이 그렇게 흘렀어도 삼분 어묵을 한입 마시는 순간 꼭 그 박물관의 짙게 흐린 하늘과 축축하게 차가운 공기와 웅성대는 사람들의 소리, 그리고 두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박물관 구경을 시켜줬던 큰언니가 당시에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어렸단 것. 이미 사회생활을 하던 나이 터울이 많은 언니가 먼 거리를 아침저녁으로 회사를 다니며 번 돈으로 종종 어린 내게 책과 CD, 간식, 용돈을 줬던 것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일제히 일어나 훅 치고 가는 기분이 들어요.

참 따뜻하고.
이상하게 조금은 서글픈 그런 기분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25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11112
2858 If 2020's Oscar-nominated movie posters told the truth [2] 조성용 2020.01.14 332
2857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 보았습니다 [24] 노리 2020.01.14 646
2856 누구나 ‘소울 푸드’ 하나씩은 있죠 [12] ssoboo 2020.01.14 945
2855 검찰 인사보복에 대해 비난할 수 있죠 [1] 도야지 2020.01.14 338
2854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스포약간), 우리는 황혼의 세상에 산다 [1] 예정수 2020.01.14 400
2853 [넷플릭스바낭] 19세기 미쿡 배경 스릴러 '에일리어니스트'를 봤습니다 [7] 로이배티 2020.01.14 786
2852 2020 오스카 후보작 링크와 명단 올려요. [10] 산호초2010 2020.01.14 584
2851 조롱과 독설과 험한말 [24] 왜냐하면 2020.01.14 859
2850 [바낭] 글을 길게 못 쓰겠다 [3] 예정수 2020.01.14 278
2849 [바낭] 고마우신 분들 [1] 칼리토 2020.01.14 317
2848 드론 이야기 - 속편? [4] ssoboo 2020.01.14 277
2847 [바낭] 주둥이로 먹고 산다는 사람들이 주둥이 함부로 놀리다 박살나는거 보면 [10] 귀장 2020.01.14 692
2846 [바낭] 남코에 로열티 좀 줬을 것같은 파워태권도 [3] skelington 2020.01.14 340
2845 신체노출을 바라보는 리액션 [1] 예정수 2020.01.14 422
2844 사람은 고쳐쓰는게 아니다란 말 뒤에 알맞는 말을 붙여주세요 [6] 가끔영화 2020.01.14 531
2843 우리는 언제쯤 기자 회견에서 대통령이 토론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35] Joseph 2020.01.14 1249
2842 주제 없고 링크 없는 정치바낭 [5] 가라 2020.01.14 521
2841 [바낭] 아무도 관심없지만 렌의 기사단에 대해서 (스타워즈 스포) [9] skelington 2020.01.14 746
2840 [넷플릭스바낭] 이정현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봤어요 [4] 로이배티 2020.01.14 668
2839 개인 방송 시작에 대해서 [10] 딸기케익 2020.01.14 85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