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삶 (스포)

2021.10.04 15:33

Sonny 조회 수:485

@ 평어체로 씁니다 양해바랍니다.



우정도 계급이다. 그 진실이 중학교 고등학교 안에서는 유달리 뭉개지기도 한다.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선생님의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급식을 먹고, 같은 교실에서 늘 한 덩어리로 뭉쳐있을 수 있다. 그래서 우정이란 환상은 유난히 진하게 새겨지기도 한다. 생긴 것도 취향도 사는 곳도 다 다르지만 함께 어울려서 웃고만 있으면 하나가 된 것 같은 그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그래서 갖게 되는 "친구"는 나 자신을 초월하는 목적이 되기도 한다. 친구랑 함께 있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친구랑 함께 해야하는 그 당연한 원인 혹은 욕망으로서의 존재.


친구라는 존재가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것은 막 갈라져나오는 자아가 부모와 다른 환경 모두에서도 떨어져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날 사랑하는지 어쩌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나와는 같지 않은 엄마와 아빠를 보며 친구의 필요를 절감한다. 사춘기의 절대적 자아는 늘 그렇게 같은 존재를 갈구한다. 한 집에서 뒤엉켜 있으면서 특별할 건 아무 것도 없이 그저 나이먹고 뒷바라지나 시시한 일상들만을 보여주는 그런 엄마와 아빠는 슬슬 거추장스럽다. 이들은 비루한 현실의 교보재다. 그 대신 작은 반항과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란 얼마나 멋진 존재인가. 그들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환상이다. 아무 일도 없이 지루하기만 할 현실의 가장 확실한 대안이 바로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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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에서 강이가 왜 가출을 하고 그 가출 끝에 왜 소영과 그렇게 멀어졌는지 그 이유는 분명히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상황들이 모호한만큼 대략적인 우정에서 보편적으로 생기는 갈등이기도 하다. 환상이 현실과 부딪힐 때, 그 파열음에 찡그리면서 우리는 옆의 사람에게 고개를 돌린다. 이건 내 탓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도대체 누구 탓인지 묻고 싶어하며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러면 대답이 필요없던 우정에는 구겨진 자국이 남는다. 어떤 아이들은 대단한 이유없이도 가출을 한다. 현실에 대단한 불만이 없는 만큼 강이에게는 친구라는 환상이 가까이 있었다. 별다른 최악은 없었지만 친구들은 그에게 늘 최선이었기에 그냥 집을 나가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소영은 부서진 환상의 조각들을 소영과 아람에게 다시 흩뿌렸다. 지금 나의 이 불편은 몽땅 너희들 탓이고 학교에서는 안보이던 너희의 구질구질함이 이제는 눈에 들어온다면서.


동등한 친구끼리는 사과가 필요치 않다. 혹은 잘잘못에 따라 사과를 한다. 그러나 우정의 기울기가 가파라질 때 누구는 절대 사과하지 않고 누구는 일방적인 사과를 요구한다. 소영이가 나오자고 했고, 강이와 아람은 그에 응했다. 함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현실은 밝지 않고 푸르스름하기만 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고 소영이만큼 강이도 아람이도 잠을 설치며 힘들어했다. 그 때 소영이는 봤을지도 모른다. 자기 주변의 어른들이 다 해주는 걸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이들의 철저한 무능을. 끽해야 돈을 번답시고 어른들의 술상대를 하는 아람이도, 덥고 지겨운 밤의 혼란 속에서 키스를 한 강이도 다 더러웠을지 모른다. 개구진 우정이 학교 밖에서 순식간에 구질구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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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는 소영이를 몰랐다. 그리고 우정도 서열대로 흘러간다는 걸 몰랐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자존심을 다치고 그걸 회복하기 위해 모든 주변인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걸 몰랐다. 소영이가 행복하지 못했던 시간의 책임은 당당하고 아름다운 자신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었던, 더러운 알바를 뛰던 그 친구들의 탓이어야 했다. 강이는 가출 이후 소영이가 벌려놓은 그 거리감에 당황하기만 했다. 그래도 우리는, 남들이 다 그래도 너만큼은, 이라는 세상 속의 예외적 존재로 하염없이 곁에 있고 싶어했다. 어떤 우정도 깨지지 않을 수 없다. 경도는 높되 쉽게 깨지는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한 이들의 시간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따. 강이만 그 가루를 쓸어안으며 멋쩍어했고 아파했다.


그래도 그 덤탱이를 뒤집어쓰고 싶진 않아서 강이는 소영이에게 말도 해보고 짜증도 내보았다. 그리고 남은 친구인 아람과 어울려다녔다. 아람이 잘 될 거라며 말을 건네본다고 했을 때, 강이는 마지막으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락실 노래방에서 할 말 있다며 다가온 소영이는 강이의 머리채를 잡고 뒤흔들며 마지막 우정을 다 부숴놓았다. 가장 친한 친구가 이토록 격렬한 증오의 상대방이 될 수 있다는 걸 강이는 계속해서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왜? 소영이 너는 왜? 어떤 우정은 갑자기 상한다.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리저리 뒤흔들면 거품을 흘러내리며 갑작스레 악취를 뿜는다. 우리의 불행은 나보다 못사는 저 새끼들 탓이어야한다고 믿는 소영이의 어른스러움을, 그 계급의식을 강이는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몰랐다. 거지 아파트 동네에서 사는 거 놀아줬더니 이제 주제를 모른다고. 서서히 멀어졌으면 차라리 덜 슬펐을까. 그 속도가 느려지기에 이들이 함께 겪은 서울상경의 밤들은 너무 급격했고 가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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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강이는 소영에게 두들겨맞았다. 엉망이 되도록 맞았다. 친구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널부러졌다. 영화에서 나오지 않는 장면이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이제 말이 아니라 온 몸으로 모욕을 남겼다. 강이에게는 이제 우정에 대한 슬픈 기대의 티끝도 남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이를 적당히 처리했고 강이는 더 이상 셋이었던 시간을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칼을 품고 학교에 갔던 순간, 강이는 차마 소영이를 찌르지 못했고 아람이는 아무렇지 않게 찾아와서 같이 서울로 올라가자고 했다. 친구가 없었고 학교에서 잠만 자느라 엉망이 된 성적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촌구석 산동네의 집만 보였다. 그래서 강이는 다시 가출을 했다. 얻을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강이는 그 자리에서 도망쳐야했다. 고등학교에서, 대입시험에서, 반 친구들에게서, 소영에게서, 자신을 향해 드라마틱하게 뭔가를 깨워주는 게 없는 부모로부터.


두번째 가출이라는 건 그 순서에 의미가 있다. 처음 가출을 하면 멋모르고 흥분할 수 있다. 그러나 강이는 이미 가출이란 걸 해봤다. 그건 아무 것도 얻는 게 없고 그저 부모님을 아프게 할 뿐인 짓이라는 걸 배웠다. 그런데도 강이는 또 가출을 감행했다. 뭔가 재미나고 짜릿한 뭔가를 할 것이라는 그 어떤 기대도 없이. 가출은 모험이 될 수 없다는 그 경험을 가지고 강이는 아람이와 집을 떠났다. 아람에게는 그 어디로든 도망치는 게 마땅한, 자신을 두들겨패는 아버지란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강이는 그런 게 있었을까. 생각도 결단도 불명확한 그는 소영에게 휩쓸렸듯이 아람에게 다시 휩쓸렸다. 도망쳐 온 곳에서는 자신한테 추근덕대는 지독한 손님들이 있었고 일을 안할 때는 매번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다. 티비에서는 자기도 똑같이 경험할 수 있었던 수능이라는 미래를 자기 빼고 경험하는 또래 학생들의 뉴스가 나왔다.


강이는 아람의 곁을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들은 더 이상 그를 반기지 않았고 밍키의 사료 봉지 안에는 개미가 들끓었다. 하나둘씩 다 사라져만 가는데 강이는 수능을 포기해서 당장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도 미래에 대한 거창한 꿈은 없었다. 그저 현재 속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만 했던 그에게 이제는 누구도 없다. 다른 모든 또래들이 수능을 보고, 실패든 성공이든 한발자국씩 걸으며 낡은 것들을 떨치고 나아갔다. 그런데 강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강이는 소영이가 했듯이 똑같이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친구에게 배운 것이니까. 소영이만 없었더라면, 소영이가 그 때 자기한테 그렇게 화를 내지만 않았다면, 소영이가 그렇게 자기를 패지만 않았다면. 강이네 엄마가 절의 텃밭에서 민들레 머리를 뚝뚝 떼어내듯이 강이도 그렇게 망가진 현재들을 뚝뚝 떼어내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떼어내야 할 것은 소영이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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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속에서 물장구를 치며 나아가지 못하는 존재는 늘 과거만을 되묻는다. 어떤 사람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도 새로운 질문을 찾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질문에 메여서 늘 거꾸로 바라본다. 왜 그랬던 것이고 왜 자신은 아직도 이러고 있는지. 자퇴한 학교를 어색하게 찾아가 마침내 칼로 소영이를 찌를 때, 그 때 강이는 기어이 질문했고 그 답을 찾았다. 헤매고 헤매였지만 어떤 답도 찾지 못했기에 강이의 질문은 그렇게나 날카롭고 무서웠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깨달았다. 티비에 나오는 찜질방 광고 속에서 에꼴 모델과 다른 형태로 소영의 꿈이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는 걸. 그 때 강이는 통곡했다. 어쩌면 더 일찍 던졌어야 할 질문들이 뒤늦게 찾아와서 생긴 통증일까. 소영이의 미래를 찔러 부순 지금은 왜 후련하지 않은지, 왜 아직도 자기는 나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지, 또 집을 떠나게 되면서 이 평화로운 엄마에게 어떤 상처를 줄 것인지, 왜 자신의 상처는 계속 커져만 가는지. 그 누구도 하나의 대답밖에 할 수 없다.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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