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왕 마고'와 뮤지컬 '앙주'

2010.06.21 14:18

노을 조회 수:2606

종교 분쟁이 한창이던 중세 말기의 프랑스, 젊은 왕들의 배후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대비 카트린 드 메디치의 슬하에는 아들 셋과 한 명의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을 추종하는 이들 왕가는 위그노파 개신교의 수장 아르튀르와 딸 마고 공주의 혼인을 추진합니다. 마침내 결혼식이 이루어지고, 수천명의 개신교도와 역시 수많은 가톨릭교도들이 하객으로 참여합니다. 언뜻 오랜 종교 분쟁의 종지부를 찍고 평화공존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혼식 직후 대대적인 학살극이 벌어져 결혼식에 참가한 개신교도 수천명이 약 일주일 사이에 모조리 몰살당합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이라 불립니다.

 

앙주는 카트린 대비가 지원하는 셋째 아들입니다. 첫째에 이어 둘째가 왕 샤를이었는데, 그들 모두 불확실한 이유로 온 몸에서 피를 흘리는 괴질에 시달리다가 사망하고, 앙주는 그 뒤를 이어 왕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 '여왕 마고'로 스크린에 걸렸습니다. 영화에 그려진 중세 유럽이 얼마나 야만적인 사회였는지!

 

같은 이야기가 멕시코인들에 의해서 뮤지컬 '앙주'로 만들어졌고, 2010년 대구 국제뮤지컬 페스티벌의 개막작으로 공연되었습니다. 이름들이 모두 스패니쉬로 바뀌었네요. 카트린은 카타리나, 앙리는 엔리케, 샤를은 카를로스, 아르튀르는 아르투로, 그리고 마고는 마르곳. 게다가 카타리나 대비를 위시하여 모든 출연진의 연령이 10대 후반에서 20세까지의 젊은이들입니다. 21세도 드무네요. 그래서인지, 이들이 묘사하는 엔리케와 마르곳, 아르투로는 영화의 앙리, 마고, 아르튀르에 비해 아직 젖도 떼지 않은 청소년처럼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화에서의 카트린 대비는 흰 머리가 수긋한 노회한 정치가입니다. 그러나 뮤지컬의 카타리나 대비는 눈에 힘이 가득하고, 마치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처럼 젊고 아름다와요. 영화에서의 앙주공은 음험하고 야심찬, 야수같은 남자입니다. 하지만 뮤지컬의 앙주는 엄마 치마를 붙잡고 칭얼대는 애기입니다.

 

영화 중, 대학살을 음모하는 씬이 있습니다. 궁궐 깊은 곳에 왕과 대비, 핵심 인물들이 모입니다. 카트린이 묻습니다. "좋아, 죽여야 한다면 죽여야겠지. 얼마나 죽일까? 열 하나?" 물론 이순간, 그 열 한 명의 얼굴은 모두 이미 카트린의 머리속에 들어있습니다. 앙주가 손가락을 꼽으며 말합니다. "열 넷." 아마 카트린의 명단 플러스 알파겠지요. 카트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플러스 알파가 누구일지도 이미 다 아는 것. 그런데 곁에서 마약에 취한 샤를 국왕이 몸을 뒹굴며 울부짖습니다. "모두 다 죽여! 모두 다!" 그리고, 왕명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광기어린 헛소리가 무사들에 의해 대참사로 나타나게 되지요. (세부 사항은 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여하튼 그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반면 뮤지컬에는 그런 장면 따위는 없습니다. 대학살은 순전히 카타리나의 의지에 따른 것이고, 그저 비명소리와 시체들의 절규가 무대에 가득할 뿐이고, 앙주는 뒤늦게야 사건의 정황을 알고는 겁에 질려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하소연합니다. "왜 저를 죄인으로 만드셨어요?"

 

영화 속에서 아르튀르와 마고의 결혼 역시 정략적인 것이고, 그것을 둘 다 알고 있습니다. 아르튀르는 위그노파 내에서의 자기 입지를 위해, 나중에 배반할 생각을 이미 하고서 늑대의 소굴로 굴러들어왔고, 왕궁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탈출할 구멍을 모색합니다. 그러면서 마고에게 정치적 제휴를 요청합니다. 사랑, 그런 것 없습니다. 결혼 하기 전부터 밤이면 가면을 쓰고 매춘부인척 뒷골목을 배회하면서 남자를 찾아다녔던, 닳고 닳아빠진 마고는 내연의 남자가 따로 있으면서 아르튀르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이것은 계산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반항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보는 사람은 그 냉정함과 영악함, 오만함에 질려버립니다. 그런데 뮤지컬에서의 마르곳과 아르투로는, 이건 그냥 로미오와 줄리엣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음산함과 영악함을 아는 어른들의 정치극이었던 '여왕 마고'와 달리, 뮤지컬 '앙주'는 부모의 권위에 반항하면서도 철없는 욕심을 가득 두른 재수 없는 10대들의 난리굿판이 되고 만 것입니다.

 

분명, 이 난리굿판은 나름 요란벅쩍한 재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배우들의 육성과 몸짓은 역시 에너지로 가득하네요. 마치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처럼 좀비 혹은 유령들이 피칠갑을 하고 넝마를 두른 채 무대 위를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장면만 좋았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소재에 대한 태도가 진지하지를 않습니다. 출연자의 연령이 낮아서인지, 남미 문화 특유의 엑스타시 취향 때문인지, 아니면, 역시 프랑스의 종교분쟁은 멕시칸들에게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인지?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제가 그들의 에너지게 공감하고 감정이입하기에는 이미 너무 나이가 들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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