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동네)

2023.04.21 12:00

조회 수:243

저는 독립하고 서울 반대쪽에서 살았지만 그 전까지는 죽 서울 북동부에서 살았습니다. 5동까지 있는 인구 많고 넓은 동네였는데 7,80년대까지 꽤 부촌이었죠. 물론 저희 집은 아니었고요.

5동 중에서 특정 동이 특히 잘 살았는데 교수 의사 변호사 대체로 직업이 이런 식이었어요. 이 때의 부자들은 마당이 넓은 2층집에서 살았죠. 80년대가 되면 상황이 살짝 달라집니다. 강남 엑소더스가 시작되긴 했지만 아직 다 이주한 건 아니었어요. 이때 지어진 집들은 지하가 아니라 어느 정도 채광이 되는 반지하를 만들고 2층은 내부가 아닌 외부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어도록 설계되었죠.  2층은 집주인이 사는 1층보다 벽지나 전등 등등이 덜 좋다든가, 지하층은 1,2층과 같은 면적을 두 가구가 살도록 한다든가 해서 그곳에 들어올 사람들의 경제력 맞춤형 설계가 적용된 것이 재미있습니다. 집을 이렇게 나눠 쓴 건 핵가족화가 진행돼서  여러 개의 방이 필요없어진 것도 있고, 경제 성장에 따라  신혼부부에게 방이 아닌 집이 필요해진 것도 있고,  부자들이 빠진 자리에 지어진 집의 주인은 예전 주인보다는 경제력이 좋지 않아서이기도 하죠. 정원을 두기보다는 집을 바짝 지어서 세를 주고 수익을 얻었습니다. 이때는 집 짓는 광경을 제가 직접 봤으니까 대충 알 수 있어요. 


저희 집은 마당만 넓은 70년대 단독주택이었어요. 한옥도 아니고 양옥의 중간단계. 당시엔 '양옥'이란 말을 많이 썼죠. 한복집과 구멍가게로 세 준 바깥채가 있고, 고모 삼촌에 가끔은 사촌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같이 살았는데 쓰는 방은 네 개였죠. 제 기억엔 아주 어릴 때는 주방이 지하처럼 내려가는 곳이었어요. 삽화처럼 계단만 기억나기때문에 자세하게는 모르겠고, 학교 들어갈 때는 주부들의 로망 '입식 부엌'으로 바뀌어 있었죠. 단차도 없어지고, 삼촌이 결혼해 나가고 다른 세 준 곳도 터서 식탁 놓을 자리도 만들고요. 식구는 줄어들었는데 방은 더 많이 쓰게 됐어요. 


저희 집은 이랬고, 저희 집이랑 비슷하게 서민용 단독주택에 살던 분들은 늦어도 90년대 초반에 대개 그 자리에 빌라나 다가구 주택을 지었습니다. 좀 넓은 집은 빌라를 지었고, 한 층에 두 가구 살 구조가 안 나오는 집은 다가구 주택을 지었죠.  저희 집은 가게로 세 주던 곳을 창고로 임대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지만 집 자체는 여전히 마당(=돈)을 넓게 차지한 채로 낡아갔어요. 

90년대 초면 강남으로 이사갈 사람 거의 다 갔을 때고, 좋은 집이건 날림으로 지어진 집이건 대체로 이런 변화를 겪었어요. 그리고 동네도 점점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독립하고 얼마 안 돼서 동네에 재개발 바람이 불었죠. 부모님 두 분만 쓸데없이 크기만 한 불편한 집에 사시다가 괜찮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뭐 좀 일이 복잡하게 풀리고 부모님은 같은 동의 반대쪽에 비슷하게 생긴 집을 새로 사셨어요.  같은 동이지만 이쪽은 재개발에서 빠졌습니다. 이것도 자산관리면에서 살짝 패착인 것 같지만 ㅋㅋㅋ 맘만 먹으면 집쯤 그냥 사는 바람들과는 다르게 '내 집'은 중요하니까요. 

전에 살던 동네 지하에 대거 포진해있던 소규모 공장들도 이쪽으로 많이 옮겼습니다. 여기라고 재개발이 피해가진 않을 텐데, 공장들은 어디로 갈까요. 서울 밖으로 나가면 물류비가 상당히 늘어날 텐데요.  금방 될 것 같더니 전에 살던 집은 십 년 넘게 질질 끌다 철거를 시작하더군요. 그동안 동네는 점점 더 엉망이 돼갔고요. 일단 재개발이 결정되고 난 뒤의 슬럼화는 정말 속도가 빠릅니다.  


그러면 개발 전 빌라나 다가구로 개축되지도 않았고 재개발에도 끼지 못한 과거의 2층집들은 어찌 됐느냐, 일부는 다른 가구에게 임대할 수 있게 집을 고쳤지만 이건 차라리 80년대에 조금 날림으로 지어진 집들의 형편이 낫습니다. 애초에 예산이 부족한 사람들이 부족분을 임대로 메꿀 생각하고 지은 집이라서 임대하긴 편하거든요. 물론 낡은 건 감수해야하지만요.  90년대에 올라간 다가구주택도 점점 낡아가면서 그런 집에 살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채우기 시작했죠. 

정통 부자들이 살던 집은 세를 주기엔 사생활이 전혀 보장이 안 되고 터무니 없이 큰 데다가 교통이 정말 형편없이 나빠요. 70년대에도 자가용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살던 집. 여러 가지 감안해서 집전체를 싸게 세준다고 해도 그 큰 집을 다 채울 식구가 있는 가정이 얼마 없어요.  그냥 빈집으로 낡고 있거나,  그나마 어디 가까운 곳에 작은 공장이라도 있으면 창고로 쓰이거나요. 운이 좋은 -나쁜 걸지도요- 집은 집 형태라도 유지하면서 카페나 음식점이 되었는데, 제법 괜찮았던 집이 알록달록한 음식점 간판 이마에 붙이고 있는 걸 보면 제국의 몰락을 보는 기분입니다. 


한때는 제 로망이었던 정원 딸린 2층집은 지금 그렇게 되었습니다. 같은 반 아이들은 그런 집에 많이 살았는데 하필 동도 같은데 저희 집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그런 집이 꽤 부러웠거든요. 

깔끔하고 괜찮은 동네로 그 동네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노년층일 겁니다.  

돈의 냄새를 맡고 강남으로 이주한 건지 -당시에도 비쌌지만 가파르게 가격이 올랐죠-, 아니면 부자들은 당대의 최고로 좋은 동네로 모이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모이' 기엔 단독주택가보다는 아파트가 더 균질적이긴 하죠. 

반 정도가 이미 헐리고 몇 군데는 새 아파트가 들어섰으니까 아마 신흥중산층 동네가 될 것 같습니다. 부르는 게 값인 것들, 그러니까 신선식품가격이라든가 동물병원 진료비라든가 병원의 비보험 진료비 등등이 인플레 감안해도 벌써 많이 비싸졌어요. 변하지 않는 건 없지만 내 편의대로 어떤 것은 변하고 어떤 것은 그대로 있어줬으면 하는 욕심입니다. 


원래는 '집'에 대해 쓰려고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동네 이야기가 됐네요. 집 시리즈를 열어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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