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02 13:56
사실 해바라기를 2006년엔가 이미 봤어요. 아니면 2007년인가? 하여간 개봉 전에 매우 친절했던 영화 소개프로그램에서 대충 내용을 다 알았던 상태였죠. 당시의 영화 소개프로그램은 지금보다 훨씬 더 친절했거든요. 그걸 보면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친절했죠.
그리고 한 06년인가 07년, 전 늘 하던 대로 과방에서 아무도 제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미간에 주름을 잡고 팔짱을 끼고 앉아있었어요. 과방엔 다른 사람 몇몇이 있었는데 불법 다운로드로 해바라기를 받아서 보고있었죠. 김래원이 나이트클럽인지 룸살롱인지 뭐 그런 곳에서 HP를 계속 회복해가며 조폭들을 척살하는 장면이었죠. 그들은 해바라기 같은 영화를 보고 감동받는 건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는건지 '오 그래! 일어나야지!'뭐 이런 추임새를 넣으며 김성모 만화 같은 B급 서브컬쳐를 즐기는 듯한 쿨한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며 영화 관람을 끝마쳤어요. 그리고는 제게 혹시 같이 가고 싶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밥을 먹으러 가더군요. 같이 밥먹자고 하면 최대한 시크하게 'Not today'라고 말하려고 하고 있었는데...아쉬웠죠. 영국 억양으로 준비해 뒀었는데.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2014년이 됐죠. 그 동안에 김수현이 쓴 김래원 나오는 드라마를 하나 봤고 거기서 김래원은 비호감이었어요. 원래 비호감이었는데 더 비호감이 됐죠. 김래원이 나오는 드라마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2014년의 어느날, 어바웃 어 보이의 주인공 같은 삶을 꿈꾸다가 실패한 저는 언제나처럼 새벽 다섯 시에 집으로 돌아왔죠. 자리에 누워 TV를 틀었는데 운이 좋으면 이대로 잠들거나 운이 안 좋으면 아침드라마까지 다 보고 자겠거니 하며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해바라기가 막 시작하고 있었어요.
주인공이 기차를 타고 호두과자를 먹으며 창밖을 보고 있더군요. 천재가 아니더라도 이건 감옥에서 나온 김래원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죠. 희석되지 않은 클리셰 원액 냄새가 코를 찌르는 장면들을 보며 곧 기분 좋게 잠들 수 있겠구나 했어요. 그런데 호두과자를 먹은 김래원이 버킷리스트를 꺼내 지우는 장면을 보고 저 버킷리스트에 뭐가 더 있나 좀더 보고 싶어졌죠.
그리고 뭐 다음 내용은 굳이 안적어도 되겠죠. 김래원은 소박한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 지워가며 살고 싶을 뿐인데 문제는 그 마을엔 벌집을 건드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김래원은 분명히 그냥 놔둬도 될 존재인데 그 마을 조폭들의 인생의 목적은 좋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거나 국회의원 당선 따위가 아니었어요. 김래원의 인내심의 한계가 어디인지 확인하는 게 그 마을 조폭들의 인생의 목적이었죠. 그들은 지식욕이 너무나 강했어요. 그 마을 조폭들의 끝없는 지식욕은 김래원의 인내심의 한계를 알기 위해 점점 강도를 에스컬레이트 시키다가 최후의 방법으로 살인까지도 불사합니다. 결국 그들은 알고 싶었던 것을 알게 되었고 만족해하며 최후를 맞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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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전엔 조소하거나 조롱하는 태도로 창작물을 볼 때도 있었지만 이젠 그게 쿨한 게 아니란 걸 알기때문에 그러진 않아요. 그리고 그런 태도를 버리고 보니 해바라기는 정말 재밌는 영화였어요. 다만 너무 처절한 전개보다는 김해숙씨도 적당히 병원만 보내고 김래원은 적당히 3년 징역 정도로만 해서 3년 후 다시 가족이 합치는 그런 전개도 나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면 좀더 보기 편했을 텐데 말이죠. 뭐 영화를 보며 이상했던 점 몇가지 얘기해 보죠.
1.김래원은 버킷리스트에 쓴 일을 지워버리면 다시는 그 일을 안하는 거 같아요. 담배 한번 폈으니까 더이상 안 핀다는 대사로 유추해 보면...한번 호두과자를 먹었으니까 다시는 호두과자를 먹지 않는 걸까요? 한번 사우나 가서 목욕했으니까 다시는 사우나에 가지 않는걸까요? 버킷리스트에는 하늘 보기도 있는데, 그 장면때까지 하늘을 안 봤을 리가 없고 그게 안지워진 걸 보면 김래원에겐 버킷리스트에서 지워버리면 다신 그 행동을 안한다는 규칙이 있는 게 맞는 설정인듯. 다시는 하늘 안 보기를 실천할 수는 없으니 '하늘 보기'를 버킷리스트에서 안 지우고 있는 거겠죠.
2.과거회상을 보면 김래원은 고교를 중퇴하고 혼자서 그지역을 다 쓸어버렸다는데...아마 초능력 계열 말고는 한국 영화 역사에서 가장 강한 캐릭터 아닌가 싶습니다. 대낮부터 소주를 까다가 자신을 습격하는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버리는 걸 보면...연습을 하거나 훈련만 받는다면 아저씨의 원빈이 다발로 와도 못이길듯. 부하도 뭐고 없고 혼자 다니는데 원맨아미 취급을 받는 걸 보면 반쯤 무협지 같기도 합니다.
3.여주인공을 보고 호 이배우는 누구지? 하고 검색했는데...휴...................
4.그런데 정말 서울에선 조폭을 본적이 한번도 없는데...지방에선 여전히 건달이 거리를 활보하나요?
5.이 영화에서 모두가 완공을 기다리고,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나이트클럽의 이름은 오라클입니다. 극중 경찰의 입을 빌어 예언자라고도 친절히 설명이 되죠.
마지막에 태식이 와서 '병진이 형은 나가있어. 뒤지기 싫으면'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조금 놀랐습니다. 누가 봐도 이상황은 김래원이 깨질 상황인데 병진이는 미래를 예언이라도
했다는 듯 조용히 걸어나갑니다. 솔직이 거기서 김래원이 지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그 지역사회에서 쌓아온, 나쁘지 않은 커리어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데 병진이는 마치 예언자처럼
침몰하는 배를 조용히 떠나죠. 저 나이트클럽의 오라클은 병진이를 의미하는 거고, 영화가 끝난 뒤 저 나이트클럽은 병진이 것이 될거라는 뜻이겠죠?
6.그런데 그 나이트클럽 인테리어가 지방이라고 하기엔 과하게 좋지 않나요? 나이트클럽이 아니라 룸살롱 같던데...
7.대체 왜 그날 과방에 있었던 그들은 내게 같이 밥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을까요? 왜?
2014.05.02 15:05
2014.05.02 15:31
비꼬는 댓글인 걸로 알고 쓸께요. 로얄샬루트 마시고 룸에서 돈스탑 빌리빙 부르느라 늦게 왔어요. 아니 일찍인가?
2014.05.02 17:00
검색해보니 엄청 비싼 술이네요. 밤새는 직업을 달리 몰라서 평범하게 편의점 알바를 떠올린것 뿐이고요. 매일마다 그렇게 비싼 술을 드시고 새벽까지 룸에서 노신다니 대체 뭐하시는 분인지..
어바웃 어 보이처럼 사시는데 실패하시고 언제나 새벽5시에 집에 들어오신다길래 맘잡고 일하시는건가 했죠. 어바웃 어 보이가 부모 재산 물려받아서 놀면서 사는 백수 이야기니까..
2014.05.02 20:14
다시 보니 제 댓글에 기분 나쁘셔서 그냥 농담으로 룸에서 노신다고 하신거 같네요. 님에 대해서 비꼬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디시 야갤 출신이다 보니.. 이해 바랍니다 ㅠㅠ
2014.05.02 15:18
저는 자조와 허세가 적당히 섞인 여은성님의 예민함이 예전부터 좋았어요~~ 뜬금고백.
오라클이 그런 식으로도 해석되는 군요. 원맨아미의 인내심을 시험해 보는 것이 목표라 만족스런 최후를 맞이했다는 표현 좋습니다~~~
2014.05.02 17:51
2014.05.02 19:17
글 정말 재미있게 잘 쓰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2014.05.02 19:26
일단 7번 질문의 답은 두번째 문단에 있네요. '....아무도 제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미간에 주름을 잡고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어요.'
전 이 글을 세번 읽었는데 세번 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글을 참 잘 쓰시는것 같아요.
2014.05.02 19:34
not today 연습하고 싶네요.
2014.05.02 23:33
대학 졸업하시고 편의점 야간 알바 하시나 보네요. 그렇지만 부모 재산 탕진하고 놀면서 어바웃 어 보이같은 삶을 사는 것 보다는 알바라도 자기가 일해서 돈 벌고 사는게 떳떳하고 좋은거죠.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