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희진에 대해 떨치면 좋을 편견들

2024.05.05 22:25

Sonny 조회 수:581

이번 기자회견은 단순히 민희진의 억하심정만이 아니라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지만 그게 제대로 전달이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민희진이 파토스를 강조하는 레토릭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정보를 독해하지 않고 그 모든 주장을 단순한 "감성팔이"로만 치부하려는 다수 청자들의 편견이 크게 작용한 결과처럼 보입니다. 이른바 객관, 이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민희진으로부터의 정보를 아예 차단해버리고 모든 것을 본인의 프레임 안에서만 보려는 일종의 고집을 부리는 거죠.


이 갈등을 최대한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몇몇 선입견을 먼저 떨쳐버릴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1. 민희진이 그냥 돈 욕심 부려서 이 사달이 난 거다


민희진의 기자회견을 있는 그대로 다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제3자인 저희는 정확히 알 수가 없겠지요. 대한민국에서 기자회견 역사상 이렇게 충격적이고 이색적인 파토스 레토릭을 보고서도 그에 대한 어떤 이입이나 해석도 하지 않는 것은 냉정한 태도가 아니라 어떤 정보를 아예 수용하지 않겠다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이런 식의 태도는 사실 "눈물이 증거입니다 ㅋㅋ"처럼 약자의 주장에 감정이 실려있으니 그 모든 게 다 감정적 선동이라는 매도처럼 들립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은 돈보다 더 사소해보이는 자존심, 기싸움, 미묘한 신경전, 원한 같은 것들로 발생합니다. 그 갈등에는 당연히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보상이나 대우 문제도 들어갑니다. 이런 디테일들을 무시하는 단순한 시선은 대개 통찰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은 돈문제"라고만 보는 상대의 말을 듣지조차 않으려느 편견이 아닐까요. 오히려, 돈 이외의 다른 것을 요구하는 사람을 그냥 돈벌레 취급하겠다는 악의적 태도에 더 가깝습니다. 수많은 유족이나 어떤 피해자들의 주장은 이렇게 "돈 문제"라는 프레임에 뭉개지기 십상입니다.


2. 민희진은 월급사장(?)이니 시키는 대로 했어야했다


이번 이슈를 두고 가장 많이 나오는 말입니다. 하이브가 먼저 짜놓은 프레임이고 저도 거기에 넘어가버렸기에 기자회견을 보고나서야 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이 역시도 자본주의의 질서를 핑계로 현실의 디테일한 사안들을 뭉갤 때 쓰는 구도이지 이해를 돕는 틀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군대는 계급이 짱이다, 같은 말처럼 들리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이나 효과적인 조직 운영을 위한 갈등을 그저 상하관계를 뒤엎은 괘씸죄로 판단하고 싶을 때 이런 논리가 동원됩니다.


다시 한번 영화감독이라는 직종의 예를 끌어오게 됩니다. 박찬욱이 씨제이로부터 투자금과 계약금을 받으면, 박찬욱은 씨제이가 하라는대로 다 해야할까요. 저는 민희진이 박찬욱 정도의 거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업계에서 이뤄낸 성취를 보자면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창작을 의뢰하는 클라이언트와 의뢰받고 창작을 하는 사람의 관계를 하이브와 민희진의 관계에 적용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박찬욱이 계약금과 투자금을 받았다고 씨제이의 부하직원이 되는 건 아니듯이, 민희진과 하이브의 관계도 종속관계라기보다는 커미션을 주고 받는 거래 관계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박찬욱이 영화를 만들기로 했는데, 제작사에서 다른 영화를 박찬욱이 만든 것처럼 홍보하겠다고 합니다. 이러면 박찬욱은 열받지 않겠습니까? 자기 영화가 이제 개봉해야하는데 씨제이에서 다른 영화부터 먼저 개봉한다고 하면, 박찬욱은 화나고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영화는 정해진 개봉일에 릴리즈가 되어야 정산이 빨리 되고 수익도 빨리 환수가 됩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예를 들지 않더라도 본인이 맡은 프로젝트의 발표와 판매가 부당한 이유로 자꾸 미뤄지면 답답하고 짜증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민희진을 뉴진스와 별 관계도 없고 책임질 필요도 없는 것처럼 단정해버립니다.  자본을 투자했으니 창작자가 그 자본의 꼬붕이 되어야한다는 이런 논리는 폭력적으로까지 들립니다. 수많은 케이 창작품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수출도 되고 있는 마당에 왜 이렇게 자본으로 창작작업을 하는 사람의 자유를 옭아매려고 하는 걸 정당화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멀티 레이블이 어떤 의미인지도 좀 감을 못잡고 이상한 예시들만 끌고 옵니다. 무슨 프랜차이즈 점주다, 고용된 디자이너다... 민희진은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SM에서도 자기보고 이사를 시켜준다고 했지만 안한다고 했다고요. 그건 민희진은 자기 이력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본인의 위치가 아무리 올라가도 어떤 회사에서 결국 최종 결정권자는 될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멀티 레이블 시스템에서 투자는 받되 경영과 기획에서 온전한 재량권을 가질 수 있는 하이브와 "협업"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멀티 레이블은 회장이 사장들 일 시키고 까라는 대로 까야하는 그런 군대 시스템이 아닙니다. 기자회견 후반에 민희진이 이야기하는 하이브의 가버넌스 문제도 이 관점의 문제일 것입니다.


3. 1000억 받는데 그게 무슨 노예냐?


이거야말로 어떻게보면 "감성팔이"가 가장 극대화된 주장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아주 큰 액수의 돈에만 흥분해서, 부러움을 표현하는 것 말고는 아무 논리도 없기 떄문입니다. 지불되는 돈의 액수는 어떤 계약의 정당함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에스엠에서 동방신기가 노예계약을 문제제기 했을 때 김희철이 소속사를 감싼다면서 그런 논리를 말했죠. 어느 노예가 건물을 사고 자동차를 끌고 다니냐고. 한 개인이 벌어들이는만큼 정당한 액수가 보상이 되는지, 다른 권리가 보장이 되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냥 "너 돈 많이 벌잖아"로 다 뭉개버리는 천민자본주의의 논리입니다. 이후 에스엠에서는 백현이 계약 해지까지 언급하며 앨범 정산서를 요구했습니다. 이게 얼마전 일입니다. 


기자회견 이후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제3자가 민희진에 이입해보는 게 먼저일 것입니다. 민희진은 특수한 사람입니다. 레드오션인 아이돌 시장에서 걸그룹을 론칭해서 하이브의 레이블 중 가장 높은 영업이익률을 달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민희진에게는 1000억이 그렇게 큰 돈이 아닐 수도 있고, 이 정도 성취를 했으니 인센티브 20억이 큰 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는 1000억 단위의 매출을 끌어내고 100억 단위의 순이익을 만들어내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거꾸로, 민희진을 자기 자리에 갖고 옵니다. 별다른 특별한 능력이 없고 월급 사오백 받으면서 만족하고 사는 회사원으로서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민희진에게도 요구합니다. 그래서 자꾸 사람들이 "1000억이면 나는 발도 핥겠다!!" 는 식으로 돈 없고 평범한 자신이 1000억을 받는 망상만을 펼칩니다. 


4. 민희진은 연봉 10억 단위로 받는 사람인데 왜 월급쟁이들이 민희진한테 이입하냐?


너무 이상한 생각입니다. 그럼 월급쟁이들은 왜 시총 8조를 갖고 있는 방시혁한테 이입할까요. 민희진이 경영권 찬탈을 시도했고 그에 따라 마땅히 벌을 받아야한다는 건 "대주주"에 이입한 입장 아닙니까. 민희진이 경제적으로 훨씬 더 많은 돈을 버는 특수한 위치의 사람이니 그에게 이입하는 게 틀렸다고 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사건에서 누군가를 판단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최소 연봉 10억 이상의 경제적 초인(?)들이 싸우는 싸움이니까요.


만일 소액주주로서 당사자성을 가지고 이번 사태에 이입한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민희진을 보는 만큼 방시혁의 언론전 플레이의 선택과 그에 따른 후폭풍을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시혁에 대한 판단은 생략해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5.  민희진은 싸가지없이 자꾸 다른 아티스트나 다른 레이블을 언급한다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민희진만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논리라면 다른 회사의 아티스트나 회사 자체를 비난하면 안된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이걸 하이브가 민희진의 어도어와 소속 아이돌인 뉴진스에게 제일 크게 하고 있습니다. 하이브가 민희진을 경영찬탈권자로 대대적으로 언론에 기사를 뿌리고, 그 때문에 뉴진스의 이미지에 심각하게 타격이 갔습니다. 이 상황에서 민희진만 예의를 차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일련의 흐름 속에서 제가 보는 결정적인 문제는 딱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민희진을 판단하는만큼, 하이브(방시혁)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 여론전의 공격을 받은 민희진이 그에 대한 리액션을 하고 있는데 어떤 여론은 민희진에게만 어떻게 해야하는지 예의와 정답을 요구합니다. 저는 이런 프레임이 민희진에게 별로 온당해보이지 않고, 민희진을 보는 시각을 똑같이 하이브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쌍방의 입장이 나왔다면 조금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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