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일하고 있는 영화사 블로그에서 연재 중인 ‘빛결의 영화 이야기’에서 가져 왔어요. 원본 링크는 여기에요. https://m.blog.naver.com/kimuchangmovie/222661324764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영화를 본 사람만 읽기를 바란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만든 호러 영화의 걸작인 <싸이코>(1960)는 아마도 히치콕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싸이코>를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 중에도 유명한 샤워실 살인 시퀀스에 국한해서만 얘기하자면 이 시퀀스를 봤거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로버트 블록이 실존 연쇄 살인범인 에드 게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원작이다. 당시의 검열 문제로 파라마운트측에서 큰 예산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히치콕은 본인이 관여한 TV물의 스태프들을 데리고 80만불의 제작비로 이 희대의 걸작을 완성했다. <싸이코>는 이 영화 이후로 나온 수많은 호러 영화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칼로 난도질하는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슬래셔 영화’를 비롯해서 이탈리아의 마리오 바바가 창시한 ‘지알로’ 장르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넓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싸이코>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한 <드레스드 투 킬>(1980)이라는 또 하나의 걸작을 만들었으며 구스 반 산트는 비록 실패작이 되기는 했으나 <싸이코>를 컬러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그리고 칸과 오스카를 석권하는 대위업을 달성한 봉준호의 <기생충>(2019)의 경우 봉준호 스스로 <싸이코>의 영향을 인정하고 있으니 이 영화의 영향력은 최근까지도 입증된 셈이다.

이혼남인 샘(존 가빈)과 밀회를 나눈 마리온(자넷 리)은 사무실에서 4만 달러를 입급하라고 회사 사장이 맡긴 돈을 갖고 도망친다. 그녀는 도망하던 도중 도로변에 있는 베이츠 모텔에 묵게 되는데 이곳에서 친절한 모텔 운영자인 노먼 베이츠(안소니 퍼킨스)를 만난다. 한편 마리온이 실종되었음을 알게 된 마리온의 언니인 라일라(베라 마일스)와 샘 그리고 고용된 탐정인 아보가스트(마틴 발삼)는 마리온을 찾기 위한 조사에 착수하게 된다.

<싸이코>는 이미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부터 이 영화의 분열성을 암시하면서 시작한다.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에서 뛰어난 타이틀 디자인 감각을 보여줬던 솔 바스는 이 영화에서 다시 한번 그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반적으로 크레딧에 자막이 뜰 때에는 단번에 배우, 스태프, 감독의 이름이 화면에 제시된다. 그런데 <싸이코>의 경우 여러가지 선이 겹쳐지거나 우측에서 온 선과 좌측에서 온 선이 만나야 비로소 자막이 완성되는데 이를 통해 자막 자체에 균열이 있음을 알 수 있고 이 균열은 곧 노먼 베이츠의 정신분열증과 연결시켜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영화는 마리온과 샘의 밀회를 몰래 훔쳐 보는 것 같은 관음증적인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시작된다. 영화가 시작되면 ‘피닉스, 아리조나’라는 자막과 함께 도시의 전경을 파노라마 숏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이 자막으로 뜨는 동시에 화면이 디졸브되면서 카메라는 점점 한 건물로 집중하기 시작하고 블라인드가 쳐져 있는 창문의 열린 틈을 통해 밀회를 즐기고 있는 마리온과 샘을 보여준다. 거대한 도시로부터 한 건물 속에 있는 커플로 카메라의 시선이 옮겨가는 것을 통해 히치콕은 영화의 메커니즘을 드러내고 있다. 도시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으나 영화는 그 중에 선택된 한 가지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초반은 다른 히치콕의 영화들과는 사뭇 다르다. 마리온이 은행에 입금해야 될 4만 달러를 훔치고 차를 타고 도주를 함으로써 범죄스릴러의 성격을 띠면서 진행되기는 하지만 어느 시점까지는 마리온과 경찰 사이의 추격전(으로 추정됨)이 긴장감을 자아낼 뿐 별 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 마리온이 4만 달러를 훔친 동기도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그녀가 베이츠 모텔에 도착하기 이전까지는 관객은 그녀가 4만 달러를 훔친 것이 발각될까봐 조마조마해한다. 히치콕은 마리온의 시점으로 영화를 주도면밀하게 진행시킴으로써 관객을 공범으로 만든다. 그렇게 한 뒤 그는 마리온이 옷을 다 벗고 샤워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살인자를 등장시켜서 칼로 난도질을 해서 그녀를 죽게 만든다. 관객 입장에서 보자면 이 살인 장면은 마리온을 계속 훔쳐보고 있었던 관객에 대한 테러 행위나 다름없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마리온은 속옷을 입고 있었다. 마리온을 훔쳐보고 있던 관객은 마리온이 속옷을 입고 있는 상태에 아쉬움을 느꼈을 수 있는데 드디어 마리온이 나체가 되는 순간 살인이 벌어진다. 이렇게 교묘한 방식으로 히치콕은 관음증을 즐기는 관객을 비판한다. 

마리온이 살해당한 이후에 노먼이 마리온의 방으로 들어오고 마리온의 시체를 보고 놀란 노먼은 마리온이 살해당한 흔적들을 하나 하나 없앤다. 시체 처리 과정에서 그때까지 관객의 주의를 끌었던 4만 달러는 마리온의 시신과 함께 늪으로 가라 앉고 만다. 그제서야 4만 달러가 히치콕이 서사에 흥미를 더하는 장치로 자주 사용하는 맥거핀이었음이 밝혀지는 것이다. 

<싸이코>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마리온은 영화의 중간 지점에서 사라져버리고 마리온이 살해당한 이후로는 노먼 베이츠 중심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자넷 리는 당대의 스타였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들 중에 <싸이코> 이전까지는 자넷 리 같은 스타 배우가 극을 이끌고 가다가 중간에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자넷 리가 중간에 죽는다는 것 자체로 이 영화는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했다. 이러한 혁신적인 서사 구조야말로 <싸이코>가 오늘날까지도 높게 평가받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싸이코>의 서사는 옴니버스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 영화 안에 마치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장르적으로 볼 때도 마리온이 살해를 당하면서 이전까지 범죄 스릴러 정도로 보였던 영화는 갑자기 호러물로 탈바꿈된다. 

사실 <싸이코>와 같이 한 영화가 두 가지 갈래로 분기하는 서사 구조는 히치콕의 또 다른 대표작인 <현기증>(1958)에서 이미 유사한 형태로 등장한 적이 있다. <현기증>에서 스코티(제임스 스튜어트)는 매들린(킴 노박)이 종탑에서 떨어져 죽은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인해 병원에서 오랜 시간 치료를 받은 이후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주디(킴 노박)를 본다. 그리고 그는 주디를 미행해서 엠파이어 호텔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를 설득해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하는데 스코티가 방을 떠난 이후 주디의 플래시백을 통해서 매들린은 사실 주디가 가짜로 연기를 한 인물이었음이 밝혀진다. 이 플래시백 이후로 <현기증>은 플래시백 이전과는 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볼 수 있는데 관객이 주디의 정체를 아는 반면에 스코티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은 이때부터 스코티가 언제 주디의 정체를 알게 될까 혹은 스코티는 주디의 정체를 알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과 함께 스코티와 주디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게 된다. 도식화해보자면 <현기증>의 1부가 스코티가 신비한 여인인 매들린을 미행하고 그녀를 카를로타의 망령으로부터 구하려다가 실패하는 이야기라면 이 영화의 2부는 스코티가 우연히 만나게 된 주디와 만남을 갖게 되다가 결국 주디의 정체를 알게 되는 이야기다. 이렇게 본다면 <현기증>에서의 주디의 플래시백은 <싸이코>에서의 마리온의 죽음과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기증>에서의 서사적 실험은 <싸이코>에 와서 보다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마리온이 살해를 당하고 난 이후에 이 영화에서 부각되는 것은 노먼 베이츠와 마리온을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어머니 사이의 관계이다. 영화의 종반부에서 노먼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두 인물이 어떤 관계이길래 노먼의 어머니가 마리온을 죽였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히치콕은 교묘한 연출을 통해 마리온에 이어서 아보가스트가 살해당하는 순간에도 노먼의 정체가 들통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엔딩에서의 충격을 유예시킨다. 

영화의 엔딩 부분에서 이 영화에서의 살인들은 노먼 베이츠의 정신분열증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이 밝혀진다. 노먼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집착이 심한 나머지 그의 어머니가 한 남자와 깊은 관계에 빠지자 두 사람을 모두 살해한 뒤에 죄의식에 시달리며 한 육체에 두가지 인격(노먼과 노먼의 어머니)을 동시에 갖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노먼이 어머니의 역할을 하면서 마리온을 죽인 것은 노먼이 마리온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낀 것에 대해 노먼의 어머니가 질투를 했기 때문이다. 즉, 노먼과 노먼의 어머니와 마리온은 삼각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삼각관계는 다른 히치콕의 영화들인 <레베카>(1940), <오명>(1946),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새>(1963) 등에서도 등장했었는데 <싸이코>는 이런 종류의 삼각관계의 가장 심화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싸이코>에서 노먼은 결국 그의 인격을 그의 어머니에게 잡아먹혀서 급기야 영화의 마지막에는 그의 육체에서 그는 사라지고 그의 어머니의 인격만 남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싸이코>에서 히치콕이 노먼 베이츠를 정신분열증 환자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히치콕이 죄의식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을 탐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히치콕의 영화들에서도 히치콕은 늘 인간의 죄의식과 욕망에 대한 탐구를 해왔다. 그런데 이전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에도 <싸이코>가 놀라운 것은 영화 속에 한 인물 안에 두 가지 인격이 충돌하는 정신분열증 환자를 중심 인물로 등장시키고 이러한 인물의 정체성을 영화의 형식과 연결시킴으로써 혁신적인 서사 구조의 영화를 발명했다는 것이다. <싸이코> 이후로는 할리우드에서도 중간에 주인공이 사라지는 것을 개의치않게 되었고 이전보다 더 다양한 형식적 도전이 가능해졌다. 흥미롭게도 <싸이코>가 만들어진 같은 해에 유럽에서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1960)가 만들어졌고 그해 칸영화제에서 이 영화는 찬반 논란에 휩싸인 끝에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면서 모던 시네마의 서막을 알렸다. 히치콕도 자넷 리를 죽임으로써 할리우드를 혁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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