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일하는 영화사 블로그에서 연재 중인 ‘빛결의 영화 이야기’에서 가지고 왔어요. 원본 링크는 여기입니다. https://m.blog.naver.com/kimuchangmovie/222658759669 그리고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영화를 보신 분들만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1954)은 히치콕의 영화들 중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작 중의 한 편이다. 히치콕은 <이창>을 필두로 해서 이 영화를 포함해서 소위 히치콕의 5대 걸작이라고 손꼽히는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싸이코>(1960), <새>(1963)를 계속 발표했는데 히치콕의 최고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출발점에 놓여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이창>의 의의는 크다고 하겠다. 이 영화는 이 영화 이후로 만들어진 수많은 영화들에 영향을 끼쳤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1966)도 이 영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브라이언 드 팔마는 <침실의 표적>(1984)을 통해 이 영화에 깊은 존경을 바친 바 있다. <이창>은 히치콕이 추구한 순수영화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구현된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카레이싱을 촬영하던 도중에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휠체어에 의지해서 아파트 안에서만 생활하게 된 제프(제임스 스튜어트)는 소일거리로 건너편 건물에 있는 집들의 창문들을 훔쳐본다. 훔쳐보기를 이어가던 그는 어느 날 쏘월드가 아내를 살해한 것 같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살인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제프가 집착하는 살인사건에 관심이 없어하던 제프의 애인인 리사(그레이스 켈리)와 출장 간호사인 스텔라(텔마 리터)도 점점 그 사건에 빠져들게 되고 급기야 그들은 건너편 건물로 넘어가서 직접 사건의 해결을 위해 참여하게 된다.

<이창>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만큼 오락성이 풍부한 작품이다. 히치콕의 가장 재미있는 영화 중의 한 편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는 일단 히치콕의 장기인 서스펜스 스릴러물로 손색이 없다. 다른 히치콕의 영화보다 <이창>이 더 흥미로운 것은 제프의 입장에서 살인사건의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다른 영화보다 관객이 더 적극적으로 영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주로 제프의 시점으로 진행이 되는데 제프의 시점 숏과 그에 대한 반응 숏 위주로 영화가 구성되어 있는만큼 관객은 제프에 동일시를 해서 영화를 보게 된다. 따라서 제프가 건너편 건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살인사건이 정말로 일어났는지에 대해 추론을 하는 가운데 관객도 제프와 함께 제프가 본 이미지들을 연결시켜가면서 사건을 추리해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창>은 또한 많은 히치콕의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남녀 관계를 다루는 로맨스가 펼쳐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거의 로맨틱 코미디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제프와 리사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명>(1946),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커플들이 어떤 운명에 사로잡혀 있고 드라마틱한 상황들을 통해 묘사가 되고 있다면 <이창>의 커플은 위의 영화들보다 훨씬 가볍고 경쾌한 톤으로 묘사된다. 히치콕의 영화는 서스펜스 스릴러의 외양을 띤 멜로드라마인 경우가 많은데 <이창>도 같은 특징을 갖는 작품이다. 제프는 리사가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는 직업과 성향을 가진 본인과 어울리지 않는 완벽한 부류의 여성이라고 생각해서 그녀와의 결혼을 꺼린다. 그런데 이웃집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제프는 그가 알지 못했던 리사의 다른 면모를 보게 된다. 그는 그녀가 적극적이고 모험심이 넘치는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그는 리사와의 결혼을 재고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창>에서도 사실 주가 되는 것은 이웃집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이 아니라 살인사건이 제프와 리사 사이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제프와 리사의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살인사건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창>은 극단적인 쿨레쇼프 효과의 실험작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쿨레쇼프 효과란 러시아의 영화감독인 레프 쿨레쇼프가 영화배우 이반 모주힌(Ivan Mosjoukine)과 함께 한 실험을 뜻한다. 쿨레쇼프는 모주힌의 무표정한 얼굴을 각각 아이의 관, 소녀, 식탁에 놓인 음식의 장면과 함께 병치해놓고 각각의 장면에서 어떤 정서적 효과가 발생하는지 살펴봤다. 이 실험을 통해 그는 아이의 관 다음에 모주힌의 얼굴을 보여줬을 때는 모주힌이 슬퍼 보이고 소녀 다음에 모주힌의 얼굴을 보여줬을 때는 기뻐 보이고 음식 다음에 모주힌의 얼굴을 보여줬을 때는 배가 고파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실험은 쇼트와 쇼트가 어떤 식으로 편집되느냐에 따라 그 쇼트로부터 생성되는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고 이후로 영화의 편집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이창>에서 관객은 제프가 이웃집을 바라보는 숏에 이어서 제프의 시점 숏이 나오고 다음으로 제프의 반응 숏을 보게 되는데 제프의 시점 숏을 통해 어떤 이미지가 보였는지에 따라서 제프의 반응 숏에서의 제프의 감정을 추측하게 된다. 이 영화는 방금 언급한 세 가지 쇼트의 연쇄로 진행되는 부분이 많은 만큼 어느 때보다 관객이 쿨레쇼프 효과를 스스로 경험하게 될 많은 기회를 얻게 된다.

<이창>의 많은 장면이 쿨레쇼프 효과로 구축된다는 것은 이 영화가 히치콕이 추구하는 순수영화에 근접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히치콕이 추구하는 순수영화는 무엇보다도 시각적 형식을 통해 구현되는 것인데 쿨레쇼프 효과야말로 관객이 영화 속 인물이 어떤 것을 보고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서사를 진행시키기에 용이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제프가 이웃집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이에 반응해서 이웃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가를 추리하는 과정이 이 영화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본다면 <이창>은 쿨레쇼프 효과만 가지고도 성립하는 영화가 되어 버린다. 이 영화의 오프닝에서 대사 한마디 없이 카메라가 제프의 이마에 맺힌 땀과 함께 제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점점 이동하면서 깁스를 하고 휠체어에 앉아있는 제프의 전신을 보여주고 부서진 카메라와 카레이싱을 촬영한 사진이 벽에 걸려있는 걸 보여주고 계속 이동해서 인화가 되기 전의 사진과 그 옆으로 그 사진이 인화되어서 실린 패션 잡지를 보여주는 것을 통해 제프의 직업과 그가 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건지를 한번에 파악하게 해주는 장면 하나로도 히치콕은 순수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창>이 빼어난 서스펜스 스릴러를 동반한 로맨스물이라는 것도 이 영화의 훌륭한 점 중의 하나이지만 이 영화가 지금까지도 많은 관객들과 평론가들에게 사랑을 받고 회자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영화’라는 매체를 심오한 수준으로 탐구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일단 제프의 상태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과 유사하다. 제프는 한쪽 다리가 부러져서 깁스를 하고 있고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든 상황에 놓여있는데 이것은 지정된 좌석에 앉아서 꼼짝없이 스크린을 바라보게 되는 관객의 처지와 다를 게 없다. 제프가 부동의 상태로 이웃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훔쳐보고 있는 것 또한 관객이 스크린을 통해 눈 앞에 펼쳐지는 이미지들을 보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관객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남의 이야기를 훔쳐보고 있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은 관음증과 연결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창>에서 제프의 관음증은 관객이 스크린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이창>은 영화의 관람 행위가 관음증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영화 매체를 탐구하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창>의 오프닝에서 크레딧 화면이 진행되는 가운데 카메라가 보여주고 있는 정면에 있는 창을 가리고 있던 블라인드가 하나씩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히치콕은 오프닝에서 이미 앞으로 보게 될 창 너머의 이웃집의 이미지들이 마치 극장의 커튼이 열리고 나타난 스크린을 통해 관객이 보게 되는 영화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영화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제프가 건너편 건물에 있는 각각의 창들을 훔쳐보는 방식으로 서사가 진행되는데 사각의 프레임으로 보여지는 각각의 창은 그 자체로 영화의 스크린을 연상시킨다. 만약 각각의 창이 하나 하나의 영화라면 관객은 제프의 눈을 통해 여러 개의 영화들을 보고 있는 셈이 된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제프의 아파트 건너편 건물의 각각의 창마다 펼쳐지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영화를 관람할 때와 유사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이웃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중에 제프나 관객 모두에게 가장 흥미로운 건 쏘월드와 그의 부인 사이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서스펜스 스릴러일 것이다.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인 <이창>을 보면서 극 중에 벌어지는 또 하나의 서스펜스 스릴러의 영화를 보고 있는 상황은 이 영화의 메타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히치콕의 모던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가 관객성을 탐구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제프의 이웃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여러 개의 영화들이라고 본다면 건너편 건물을 하나의 스크린이라고 상정할 수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흥미로운 일이 발생하는데 쏘월드가 그의 부인을 살해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결혼 반지를 찾기 위해 리사가 직접 건너편 건물로 건너가서 몰래 쏘월드의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리사는 관객의 위치에서 이웃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제프와 함께 보고 있었는데 그녀가 건너편 건물로 침입했다는 것은 관객이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본다면 리사는 스크린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개입해 그녀가 능동적으로 서사의 진행에 영향을 끼친 상황이 되어 버린다. 마찬가지로 쏘월드에게 발각되어 위기에 처한 리사가 뒷짐을 진 채로 제프에게 몰래 쏘월드 부인의 결혼 반지를 끼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보여주는데 쏘월드가 그녀가 제프쪽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을 눈치채고 만다. 그러자 쏘월드는 건너편 건물로부터 제프가 있는 아파트로 찾아와서 제프를 공격한다. 건너편 건물이 스크린이라면 쏘월드가 제프를 공격하기 위해 제프의 아파트로 찾아온 것은 스크린 속에 있던 쏘월드가 스크린 밖으로 나와 관객의 입장에 있는 제프를 공격한 것이나 다름없다. 리사가 건너편 건물로 들어가고 쏘월드가 제프의 아파트로 찾아오는 것을 통해 히치콕은 영화를 보는 관객과 영화와의 관계를 흥미롭게 탐구하고 있다. 관객이 없이는 영화는 성립할 수 없으며 영화와 관객 간의 상호 작용은 영화를 관람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이창>은 제프가 쏘월드와 싸우다가 결국 창 밖으로 추락하면서 나머지 한쪽 다리마저 부러지는 결과를 초래한 채 종결된다. 이러한 결과를 통해 히치콕은 영화 내내 이웃집을 훔쳐보고 있던 제프의 관음증에 대해 단죄를 내린다. 제프에게 관음증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영화의 결과는 우리가 관음증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또한 일깨우게 만든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우리는 잡지사 편집장과 제프의 통화를 통해 제프가 일주일 뒤면 깁스를 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는 영화의 말미에 가면 깁스를 풀기는 커녕 오히려 한쪽 다리를 더 못 쓰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만약 제프가 일주일 뒤에 깁스를 풀었다면 그는 더 이상 아파트 안에 갇혀서 이웃집을 훔쳐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쪽 다리가 마저 부러지는 바람에 제프는 앞으로도 몇 주 이상을 아파트에 머무르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제프가 리사에 의해 이웃집을 훔쳐보는 것을 방해받을지라도 수많은 시간들을 아파트 속에서 무료하게 보내게 된다면 그는 또 다시 관음증의 유혹을 느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이창>은 히치콕의 고도로 짓궂은 유머를 통해 인간이 관음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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