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일하고 있는 영화사 블로그에서 연재 중인 ‘빛결의 영화 이야기’에서 가져왔어요. 원본 링크는 여기에요. https://m.blog.naver.com/kimuchangmovie/223006459045)


제1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자 역대 최고의 영화 중의 한 편으로 손꼽히는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1955)는 영화와 신학이 만난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데트'는 덴마크어로 '말씀'이라는 뜻인데 이 영화는 덴마크의 목사인 카이 뭉크의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시종일관 고요한 신성함으로 가득 찬 이 영화는 종국에는 숭고한 경지로 나아간다. <오데트>는 믿음과 기적에 관한 가장 위대한 영화다. 얼마 전에 발표된 영국 영화잡지인 ‘사이트 앤 사운드’ 역대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서도 <오데트>는 비평가 선정 48위, 감독 선정 30위를 차지한 바 있다.

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모르텐 보겐은 근심에 빠진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가 가장 기대를 했던 그의 둘째 아들 요하네스가 신학을 공부하다가 미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며 예수를 흉내내는 행동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셋째 아들인 안더스는 그와 대립되는 신앙을 가진 재단사 피터의 딸인 안나와 결혼하고 싶어한다. 이런 가운데 임신 중이던 그의 첫째 아들 미켈의 아내인 잉거가 출산 도중 아이가 사산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오데트>는 장르적으로 보자면 가족 멜로드라마에 속한다. 이 영화는 보겐 일가의 일상을 차분하게 보여주면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요하네스는 새벽부터 밖에 나가서 언덕 위에서 설교를 하고 미켈은 농장 일을 하고 안더스는 재단사 피터의 딸인 안나에게 청혼을 하려고 그녀의 집에 간다. 잉거는 시아버지인 모르텐으로부터 안더스가 결혼 승낙을 받을 수 있도록 모르텐을 잘 대접한다. 이렇게 이 영화에서는 특별한 사건이랄 게 없는 평범한 일상만이 보여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일상의 디테일들과 시간들이 쌓여가며 점점 초월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이 영화는 도입부를 비롯해서 잠깐씩 야외의 풍경들이 보여지기는 하지만 공간적으로 볼 때 주로 보겐 일가의 집 내부와 재단사 피터의 집 내부 두 군데에서만 진행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실내극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제한된 공간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애초에 무대극을 염두에 둔 희곡에 충실하게 드레이어가 영화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희곡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롱테이크 기법을 도입해서 연극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실험을 한다. 이 영화는 보겐 일가의 집이나 피터의 집 내부를 보여줄 때 가능한한 쇼트를 쪼개려고 하지 않고 롱 쇼트를 이용해서 긴 호흡으로 집 내부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카메라는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일 때가 많다. 연극이었다면 관객은 객석과 무대와의 일정한 거리가 정해진 상황에서 무대 전체를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면서 연극 관람 상황보다 실내 공간에 가깝게 밀착된 채 훨씬 디테일하게 공간의 내부와 인물들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연극과는 다른 사실성을 획득하게 된다.

시종일관 그저 일상만이 나열된 뿐인 이 영화가 관객에게 일상을 넘어서는, 일상에 잠재해있는 듯한 초월의 감각을 전달해주는 것은 형식적인 고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영화의 전개 속도는 상당히 느리다. 일반적으로 관객은 사건들의 연쇄 속에서 국면들이 계속 전환되는 서사에 익숙하다. 그런데 <오데트>에서 그런 식의 국면 전환은 일어나지 않으며 보통의 영화였다면 편집되었을 법한 순간들을 이 영화는 생략하지 않은 채 길게 보여줄 때가 많다. 따라서 관객은 서사의 진전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 영화의 속도감을 크게 느끼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느림의 감각은 이 영화에 자연스럽게 경건함과 초월성을 부여한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고요하게 일상이 흘러가고 있음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초월성을 부여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이 영화의 섬세한 조명의 사용이다. 이 영화의 실내 장면은 베르메르의 회화를 방불케하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영화는 빛의 조율을 통해 실내 공간에 놓여있는 사물들과 그 공간에서 움직이거나 정지해있는 인물들을 섬세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해주며 그러한 빛의 설계로 인해 만들어지는 시각적 무드는 관객이 일상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성을 감지할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이 영화 속에는 믿음에 관한 다양한 입장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요하네스는 미쳐서 자신이 예수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그의 정신이 말짱해진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는 믿음을 통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미켈은 신을 믿지 않는다. 잉거는 일상 속에서 작은 기적들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모르텐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실의에 빠져있다. 의사는 과학을 믿는다. 잉거의 딸은 순수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이 영화 속에서는 인물들을 통해 믿음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제시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일어나는 기적은 믿음에 대한 인물들의 생각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도 믿음과 기적에 대해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오데트>는 무엇보다도 ‘기적’에 관한 영화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관건은 기적을 설득력있게 그려내는 데에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목사는 “현대 사회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영화는 어느 시점까지 그 말이 진실인 양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의심과 회의 속에서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과 심지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조차 기적을 믿지 않게 되는 지점이 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드레이어는 놀랍게도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적은 더욱 경이적으로 다가오고 설득력이 있다. <오데트>는 결국 이 기적을 향해 나아가는 작품이다. 순수한 말씀에 대한 '믿음'이 '기적'을 실현시킨다. 그 기적과 마주하기 위해 우리가 영화의 느린 시간들을 견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적 장면이 벌어지는 공간 연출도 기적을 설득력있게 만드는 측면이 있는데 그 장소가 오로지 영화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레이어는 영리하게도 영화 속에서 보겐 일가의 집의 실제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시각화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기적이 일어나는 공간은 이전에 나왔던 공간과 비교할 때 대단히 넓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상상해왔던 보겐 일가의 집의 실내에 과연 저런 공간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거대한 곳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공간은 시각적으로는 보겐 일가의 집의 일부로 보이게 연출되어 있지만 한편으로 보자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종의 초월적인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초월적인 장소에서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에 일상의 차원에서만 기적이 묘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속 기적이 보다 설득력있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영화사 최고의 명장면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오데트>의 기적 장면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영화 사상 가장 놀랍고 숭고한 순간이라고 할 만하다. 아무런 특수효과도 없이 기적을 담백하게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이 기적이 실제로 믿어진다. 진실로 기적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장 뤽 고다르는 그의 작품인 <영화의 역사(들)>(1998)에서 영화사에서 기적을 보여준 감독은 알프레드 히치콕과 칼 드레이어밖에 없다고 했었는데 이 기적 장면으로 인해 <오데트>는 그 말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만약 누군가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정말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순간과 마주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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