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알렉산드리아

2014.12.10 06:32

곽재식 조회 수:2297


이병주의 데뷔작으로 흔히 언급되는 1965년작 중편 소설이 "소설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이 소설은 한국인인 주인공이 무슨 일인지 지중해변의 아름다운 휴양, 향락, 관광 도시로 묘사되고 있는 알렉산드리아에 와 있고 그곳 정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출발해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겪은 일들을 펼쳐 가는 내용입니다.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한 부분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한 호텔 쇼 무대에서 관악기 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주인공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겪는 일들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에 갇혀 있는 주인공의 형이 편지로 주인공에게 자기 사연을 알려 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형의 편지 내용은 대체로 감옥 생활의 특이함, 비참함과 감옥에서 본 것들을 자조적으로 읊조리면서, 한국 현대사의 사상 문제, 사회 문제를 거론하는 것입니다. 내용은 생기 있다기보다는, 그 시절 유행하던 말투로 인문학 어휘와 표현들을 주절주절 문어체로 읊어 대는 것들입니다. 지금 보면 좀 우스운 대목이 있을 정도로 "부르짖는"시적인 어투의 말투에, 양식화된 웅변 대회 대사 같은 것들도 있어서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있습니다만, 오히려 그런 것이 정말로 60년대 쯤의 좌절한 지식인의 대사 같아서 요즘 보면 역으로 솔직한 느낌이 드는 맛도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겪는 이야기는 어찌어찌하다가 알렉산드리아까지 관악기 주자로 흘러들었는지에 대한 간단한 회상과, 거기에서 수수께끼의 아름다운 댄서와 정체 불명의 독일인을 만나 친해지는데, 알고 보니 두 사람 모두 원수를 갚는다는 목적이 있어서 거기에 얽힌 추적, 결투에 대한 내용으로도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의 사연은 딱 40,50년대 할리우드 느와르풍 모험 영화 이야기입니다. 무대에서 만난 관악기 주자와 여자 쇼 걸이 얽히는데, 여자 쇼 걸은 숨겨진 사연이 있다니, 이렇게 전형적인 형태도 없습니다. 게다가 사연이 벌어지는 죄악이 항상 떠돌고 있는 도시의 뒷골목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80년대 TV물 "블루문 특급" 에피소드 중에 "전형적인 느와르 영화"를 일부러 흉내내러 했던 편의 출발도 딱 이랬습니다.

게다가 사건이 점차 풀려나가는 구도라든가, 절정 장면 근처 결투 장면의 운치, 막판에는 법정극으로 이어지는 구성도 40,50년대 할리우드 느와르 영화에서 아주 자주 보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목인 "알렉산드리아" 조차도 느와르풍이 가미된 당시 모험 영화에서 종종 사용하던 이국적인 지명을 제목으로 쓰는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캘거타", "마카오", "카사블랑카" 같은 영화들 말입니다. 비슷한 분위기를 일부러 흉내낸 요즘 영화로는 "샹하이"도 있겠습니다.

이런 구성 덕택에 이야기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고, 사건이 쭉쭉 잘 뻗어 나간다는 것이 장점이었고, 느와르 영화 다운 낭만이 서려 있는 부분도 군데군데 드러나는 것이 재미였습니다. 그랬습니다만, 대신에 사연은 크게 복잡한 면이 없고, 인물의 묘사나 서술도 개성적인 부분이 적고 너무 정형화된 것들이 많고 단순하다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이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 독일인을 싫어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위해, 어떤 그럴듯한 장면 속의 이야기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대뜸 주인공이 대사로 "나는 독일인은 질색이오."라고 말해 버리고 그것으로 전부라는 식인 겁니다.

형의 편지와 주인공의 모험이 따로 노는 것도 단점입니다. 옥중에서 생활하는 형의 편지는 그 나름대로는 재미 있는 점이 있습니다. 특히 박정희 장군의 집권 이후에 잘못 걸려서, 신문에 박정희 장군 마음에 안드는 사설,글 두어편 썼다는 게 죄가 되어 무려 10년형(!)을 언도 받고 실제로 감옥생활을 했던 작가의 경험과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앞서 말했듯이 문어체로 부르짖는 어휘들이 너무 넘쳐 나서 생동감은 약간 약하고, 주인공의 모험과 밀착된 사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럴듯한 추억의 영화들을 생각하면서 당시 60년대 유행하던 한국 영화에 잘 어울릴법한 형태로 주인공의 모험 이야기를 썼는데 그것만으로는 분량이 부족하잖습니까? 그래서 그냥 평소에 마음에 맺혀 있던 감옥 시절 기억, 감옥에서 절절하게 생각했던 거 메모해 두었던 거, 그걸 그냥 "편지 왔는데 이런 내용 적혀있더라"는 식으로 때려 넣어서 분량을 늘린 듯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초반에 비중이 컸던 형의 이야기는 결말 즈음에 이를 즈음에는 슬그머니 별 역할 없이 물러 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초장에는 형의 편지도 나름대로 역할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이국적인 환락의 도시에서 쓸쓸히 방랑자로 흘러든 동생의 처지와 좁은 감옥에 박혀 철창 밖만 바라보는 답답한 형의 신세가 화끈하게 대조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동생이 보는 알렉산드리아의 풍경은 더욱 환상적으로 부각되고, 형의 뜬구름 잡는 문어체 편지 대사와 어울리면 마치 알렉산드리아를 헤메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라비안 나이트의 꿈결 같은 풍경처럼 꾸며지는 멋은 있었다고 느꼈습니다.


그 밖에...
문단 데뷔 작가 중에는 이래적으로 40대의 늦은 나이로 작가 생활을 시작한 이병주는 이런 점만 놓고 보면 일본의 마쓰모토 세이초가 생각나는 면도 있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추리 작가고 이병주는 대중적인 소설을 많이 쓰면서도 순문학 작가로 자주 분류되기는 합니다만. 공교롭게도 이병주의 단편 소설 "겨울밤"에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북의 시인"이 꽤 긍정적인 느낌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예전 시대에 한동안 마쓰모토 세이초가 한국 문단에서는 좌익작가로 분류되어 악인처럼 불리우거나, 상업적인 소설만 양산해 내는 2류 작가로 멸시 되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형의 편지에 나오는 감옥 생활에서 보고 느낀 것에 대한 내용은 이병주 작가의 거의 수필에 가까운 단편 소설 "겨울밤"에서 일부 똑같이 반복되어 나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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