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마술사 / 겨울밤

2014.12.08 20:51

곽재식 조회 수:1987


얼마전에 이병주 전집이 묶여 나올 때 나온 소설집입니다. 중편소설이라고 할만한 "마술사"와 단편소설인 "겨울밤"이 묶여 있는 책으로, 두 편이 엮여 있을 뿐이라 책도 작고 얄팍합니다. 마술사는 재밌는 소설로 로알드 달 느낌이 도는 환상적인 분위기가 깔린 이야기면서도 현대사의 격랑을 주무대로 하는 이병주 소설의 전형적인 소재가 나타나는 점이 볼만한 내용이었고, 겨울밤은 소설과 수필의 경계에 있는 형태로 소설을 써버리는 이병주의 특징이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내용이었다고 요약해 봅니다.

마술사의 내용은 로알드 달의 "기상 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와 매우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는 점이 있었습니다. 액자 형태로 기이한 사연을 듣는데, 기이한 사연은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마술을 현대 사회에서 터득하려는 사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실 도대체 무슨 사연인지도 모르고 "어쩌다가?" "무슨 사연일까?"라고 궁금해 하면서 그 다음, 그 다음을 넘겨 보는 것이 재미인 소설이었습니다만, 결말은 빼놓고 구체적으로 내용을 말해 보면 이렇습니다. 지리산에서 우연히 들은 이야기를 늘어 놓는 형식인데, 이야기란 것이 일제시대에 악명 높은 임팔 작전의 일환으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 학병으로 미얀마에 투입된 주인공이 탈영을 한 뒤에 인도인 마술사를 만나 거의 초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마술을 전수 받아 최고의 마술사가 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터로 가는 사람의 심경과 이국의 정경, 마술이라는 신기한 소재와 명상과 수련이 중시되는 인도식 신비주의가 차례로 아주 부드럽게 얽혀 드는 내용입니다. 초반부에서부터 지리산의 밤에 이상한 소동이 벌어지는 것으로 시작해서 호기심을 환기시키는 것도 재밌었고, 조상 묫자리 살펴 보러 산에 올라가는 토속적인 소재로 시작해서 삽시간에 인도인 마술사의 무대인 이국적인 세계로 이야기가 쑥쑥 넘어 가는 모습도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 속에서 환상적인 이야기와 함께, 현대사의 풍경들도 같이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단점이 있다면, 이병주 소설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못어울릴만큼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교훈적으로 펼쳐지는 "바른 역사관 설교" 대사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야기와 잘 섞이지 않을 정도라서, 군데군데 어색한 느낌인데, 그래도 지금보면 옛날 소설 다운 소박한 흥취가 있어서 아주 이상하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야기의 결말도 이런 환상적인 내용을 다루는 이야기가 자주 택하는 표준적인 결말을 택하면서도 그야말로 표준에 가깝게 깔끔하고 흥미로우며 여운이 남게 매듭 짓고 있어서 즐거운 느낌이었습니다.

약간 과장해서 평가하자면, 1968년에 나온 소설입니다만, 요즘의 김영하나 성석제 작가의 소설과 같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인간성을 다루는 주제가 잘 버무러진 느낌이 살아 있어서 유행을 훌쩍 앞서간 느낌도 난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마술사"에 비하면 "겨울밤"은 분량도 짧고, 내용 구성도 치밀하기 보다는 그냥 두런두런 할 말을 이리저리 늘어 놓는 형식입니다. 그래서 형식도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 형식입니다. 소설적으로 지어낸 이야기들이 끼어 들어 가 있기는 하니까, 진짜 수필 느낌은 아닙니다만, 작가의 겪은 일에 대한 감상과 그에 대한 주장, 생각 같은 것을 늘어 놓는 형태라서 수필에 아주 가깝습니다.

내용은 이병주의 데뷔작으로 흔히 언급되는 "소설 알렉산드리아"에서 감옥에 갇힌 형의 이야기와 거의 비슷 합니다. 아예 몇몇 대목, 몇몇 문장은 그대로 반복해서 나오는 수준이라 봤던 것 또 본다는 느낌마저 있었습니다. 다만 "소설 알렉산드리아"에서 형의 이야기가 어딘가 서사시적으로 무겁고 약간 과한 어조로 주절 주절 읊어대는 관념적인 느낌이 강했다면, 이 "겨울밤"은 그보다는 더 가볍고 더 감성적이고 웃어 가는 느낌으로 감옥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상을 이유로, 혹은 정치적 혼란상 대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을 짤막짤막하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이야기들은 이 이야기가 전체 구성에 극적인 느낌이 약한데도, 그 하나하나는 진솔하게 와닿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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