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수꾼 Bleak Night (2011)

2012.02.02 14:54

Le Rhig 조회 수:3268

기태와 동윤, 희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희준과 동윤, 그리고 기태는 고등학교 2학년 친구들입니다. 기태와 동윤은 서로 중학생 때부터 알아온 친구들이고, 희준은 고등학교에 올라와 기태와 같은 반이 되면서 이들과 친구가 됩니다. 스테레오타입에 갇혀 있는 듯 그렇지 않은 듯한 이 평범한 친구들은 월미도 여행을 기점으로 균열이 생긴 우정과 그 틈으로 싹튼 증오, 환멸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다가 기태의 죽음으로 미완으로 남은 관계 안에 갇히게 됩니다. 평생을 따라다닐 지긋지긋한 죄의식을 서로에게 남긴 채로 말이죠. 그리고 그 과정은 오페라가 따로 없습니다. 이 친구들은 순간순간 최악의 결정만을 하며 이들의 우정이 바닥 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아요. 멜로드라마가 따로 없습니다.


영화는 이들의 이야기를 미스터리 형식을 통해 그리고 있습니다. 아들의 장례식 이후 아들의 죽음에 묶여 아들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는 기태 아버지를 통해 기태 친구들의 회상이, 그리고 이 친구들의 멜로드라마가 조금씩 그려지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조금씩 그려지던 멜로드라마는 마지막 동윤의 회상을 통해서 그 베일을 벗게 됩니다. 이 멜로드라마의 중심에는 왠만한 오페라 세리아의 프리마 돈나 뺨치는 캐릭터인 기태가 있습니다. 결국 친구들의 회상을 통해서 벗겨지는 베일, 미스터리는 멜로드라마의 중심인 기태인 거죠.


남들 다 칭찬하는 플롯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자면, 잘 쓰였어요. 멋드러지고 축약적인 내러티브의 시작-오프닝과, 타이틀을 사이로 오프닝과 단절되어 현재 시점의 미스터리가 시작되는 시퀀스는 충분히 관객의 시선을 끌고 관객을 드라마에 집중하게 합니다. 이어지는 시퀀스도 인물 설정과 사건 설정, 미스터리의 단서들을 조금씩 완급 조절하여 내보이기 때문에 끌어놓은 관객의 시선이 분산되지 않게 잘 잡아 놓고요. 다른 스토리텔링 플롯들 보다야 역사가 오래지 않은 플롯이긴 하지만, 멜로드라마와의 궁합은 여타 작품에서 그 효과가 증명된 플롯이기에 잘 끌어다 썼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 시퀀스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텐데 그건 뒤에 가서 얘기하도록 하죠.


멜로드라마의 중심-기태에 대해 얘기하자면, 기태는 위악으로 가득찬 캐릭터입니다. 타고난 성질 탓인지 환경 탓인지 그 나이의 그 호르몬과 그 환경 탓인지 보여지는 것에 급급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습니다. 이 캐릭터는 종종 위선하기도 하는데, 그걸 보면 이 캐릭터의 위악, 위선은 자기가 그러자고 그러는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하게 된 거란 말이죠. 되게 처량한 드라마를 등에 업고 질게 먹먹한 길을 걷는 캐릭터인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런 사람일지라도 단순맹충한 스테레오타입은 아닌 거지요. 동정할 구석이 많은 캐릭터입니다. 그 점이 기태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멜로드라마를 제대로 기능하게 합니다.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지만, 기태라는 캐릭터로 인해 멜로드라마가 일종의 종교 드라마가 되었단 생각도 했어요. 기태의 숙명적인 고난의 길과 차고 넘치는 죄의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특정 종교를 떠오르게 하지 않겠습니까? 아, 네, 제가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했죠? 압니다, 알아요.


기태의 초라한 죽음은 극적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입니다. 뻔하고 상투적인 얘길 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에요. 그래도 말이 나왔으니 뻔하고 상투적인 얘길 먼저 하자면, 이 평범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멜로드라마로 끌고 올라가려면 누군가가 크게 다치거나 미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요. 두 가지 모두를 다 하고서도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기태가 극적으로 죽은 것인데, 기태의 입장에서 보면 그게 참 현실적인 매듭이란 말이죠. 자신의 몰려진 상황이 삶을 갈망할 이유를 상실케 했으니 죽기 말고 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아니, 할 수 있는 거 다 해봤죠. 그리 해도 수습이 안 됐으니 결국엔 초라히 자신의 삶을 매듭지을 수 밖에. 뻔하지 않고 상투적이지 않은 얘길 하자면, 하아, 인생이 원래 그래요. 아닌 것 같아도 살다 보면 그렇거든요. 앞에서 말했듯이 기태의 죽음은 친구들과의 관계를 미완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원래 인생에서 인간관계라는 게 그렇게 중간에 싹뚝하고 끊겨버립니다. 인생이 길잖습니까? 그 길고 긴 삶에서 이런 사건 하나 관계 하나가 형성되고 몰락하는 게 완전한 매듭을 갖지 않아요. 중간에 흐지부지해졌다가도 다시 타오르다가도... 결국 자신이 의지로 죽는 게 아니고서야 죽고 나서 보면 그냥 중간에 싹뚝 끊기는 거거든요. 절반의 의지이긴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죽은 기태에게야 매듭이지만, 남겨진 희준과 동윤에겐 그건 매듭이 아니에요. 특히 전이된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운 동윤에겐 그게 평생을 쫓아다닐 겁니다. 기태의 멜로드라마가 끝난 시점에 동윤의 멜로드라마는 다시 시작하는 거지요. 그래서 극적이라는 겁니다. 예, 뻔하지 않고 상투적이지 않은 얘기죠? 인생이 원래 그렇다고 시작했을 땐 그리 안 보셨겠지만.


희준과 동윤, 그리고 기태 아버지는 중요 등장인물임에 틀림없지만, 영화를 시작하고 매듭짓는 데에 쓰이는 철저히 도구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멜로드라마의 중심은 기태이기 때문에 이들을 중심에 가져다 놓으면 멜로드라마가 무너질 수 밖엔 없거든요. 특히 기태 아버지는 도구적 성격 외엔 아무 것도 없는 캐릭터입니다. 물론 그 안에 사연이 있겠지요. 그것이 과감히 편집된 것은 당연한 일이겠습니다만. 희준과 동윤은 기태 아버지에 비하면 낫습니다. 희준과 동윤은 전반부와 후반부에 중심 가까이에 들어오거든요. 멜로드라마의 중심인 기태가 스테레오타입이 아니라 해도 멜로드라마의 중요 등장인물인 희준과 동윤이 스테레오타입으로 존재한다면 멜로드라마가 제대로 설 수 없어요. 인위적인 멜로드라마가 될 수 밖에 없는데 고등학생의 90%가 대학에 진학하는 요즘 같은 고학력 시대에 누가 그런 멜로드라마를 원하겠습니까? 영화가 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 데에는 이들이 스테레오타입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현실적이라는 얘기가 나왔으니까,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는 캐릭터 셋과 현실적인 이야기 외에도 영화를 현실적이게 만드는 데에는 배우들의 호연이 큽니다. 요새 단편 독립 영화 작업을 하면서 연기와 연기 연출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면서도 연기와 연기 연출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어요. 감상을 적으면서 제일 먼저 생각한 쓸거리 또한, 그래서, 연기와 연기 연출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지금 제 이야기 보따리를 풀러 보자면, 배우들의 호연은 배우들 개인의 역량 덕이 아니라 감독이자 각본가인 윤성현의 역량 덕입니다. 일단 각본에서부터 연기를 위해 쓰여졌다는 게 눈에 보여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감정의 흐름이 다 들어가 있는 거죠. 다이얼로그 위주로 각본을 썼다는 것에서도 배우의 연기를 연출의 중심에 둬야겠다는 의지가 보이니 각본 과정에서 이미 연출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각본을 넘어서 연출에서도 배려가 보입니다. 영화 보기 전날 봤던 무산일기는 무식하게 멜로드라마 씬을 롱테이크로 밀어 붙였는데, 섬세한 연기가 필요한 씬에서 그렇게 무식한 연출을 하면 아무리 위대한 연기자라 할지라도 쉽게 연기할 수 없을 테죠. 각본 단계에서 먹기 좋게 잘게 나눈 감정의 조각들을 촬영 단계에서도 조각조각 찍어내는 배려를 한 데다가 멋지게도 그 조각조각이 그냥 조각으로 남지 않게, 흐름을 끊지 않게 이어 붙였어요. 이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그 감정 씬들 앞 뒤로 무드까지 깔아주시니 성은이 망극할 수 밖에. 감정 씬에서의 배우들의 연기를 더럽히지 않고 필요할 때에만 음악을 넣어 주신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배우들의 뒷모습을 찍어주는 것도 연기에 대한 배려인 것이고요. 수더분하게 늘어놓긴 했지만, 모든 게 사실입니다. 성은이 망극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나이다!


슬슬 감상을 매듭지을 때가 되었으니 앞서 미리 언급한 논란 있는 마지막 시퀀스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미스터리와 그 해답인 회상이 번갈아 제시되던 영화의 형식은 마지막 시퀀스에 다달아 반전을 맞습니다. 희준의 방문 이후 동윤이 꿈속인 듯 회상인 듯 기태와 대화하는 장면들이 등장하는 거지요. 회상이 맞을 겁니다만, 회상 속엔 현재 시점의 동윤과 기태가 존재하는 겁니다. 영화의 일관성을 흐트리는 것도 같고 멋드러진 결말을 주는 것도 같아서 아리송하단 말이죠. 제가 느끼기엔 전자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영화가 그동안 끌고 온 현실감을 무너트린다는 게 문제입니다. 집에서의 대화를 회상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맥락이 있는 장면이라 하더라도 갑자기 인위적인 티가 도드라지게 나타나니까 현실감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제대로된 매듭인 척 던져지지만 사실은 매듭이 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수색역에서의 마지막 대화 장면이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관계는 미완으로 남겨질 수 밖에 없어요, 절반의 의지라도 갖고 죽기 이전에는. 그런데 그런 미완의 관계를 단순한 회상과 그에 대한 현재 시점의 생각으로 매듭지어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상상이죠. 그게 영화의 매듭으로 존재하니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니고야 뭐겠습니까? 영화 언어로 봤을 땐 멋진 시퀀스일지는 몰라도 스토리텔링에 있어선 안이한 시퀀스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영화는 좋습니다. 시나리오도 좋고 촬영도, 편집도 잘 됐어요. 논란 있는 마지막 시퀀스도 영화의 흐름을 따라 보면 당연하진 않아도 그 불균질함이 매력으로 보이기까지 하죠. 마스터피스는 아니지만, 걸작에 근접하고 제게 있어 개인적인 호감은 그보다 큽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기태의 캐릭터죠... 잘 쓰인 캐릭터고 좋은 캐릭터인 건 맞는데, 제가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알아요. 그 사람이 하고 다닌 짓을 생각하면 도저히 기태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더군요. 속에서 열불나서 뺨을 후려치고 싶을 뻔했으니...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인가 봅니다.


le rhig

2012.02.02

http://blog.daum.net/lerhig/4



가지가지.

① 이제훈의 차기작은 차우 신정원의 점쟁이들... 심히 걱정됩니다.

② 이제훈의 연기는 고지전에서 보다 낫습니다. 당연한 것이 파수꾼에서는 감독의 연기에 대한 배려가 상당한 데에다가 비교적 연기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이죠. 고지전은 연기 보다 스타의 아우라가 더 중요한 영화 아니겠습니까?

③ 같은 해 같은 겨울 개봉한 혜화, 동이랑 자주 엮이어 다뤄지는 모양이더군요. 저는 아직 혜화, 동 못 봤어요. 파수꾼도 이번 KOFA의 기획전을 통해 봤으니, 혜화, 동은 언제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④ 남고괴담으로 불러도 될 것 같아요.

⑤ 영화 본 그 날 밤에 쓴 감상인데, 비문도 많고 쳐낼 가지나 붙일 가지가 상당합니다. 그런데... 수정하기가 귀찮아서... 그냥 포스팅...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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