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라다이스: 러브

2013.10.28 10:51

menaceT 조회 수:3123

 

Paradies: Liebe (2012)

 

10월 27일, CGV 압구정. 

 

  어떻게 보면 상당히 통속적인 스토리의 영화이다. 잔뜩 불어버린 몸의 아줌마가 되어버린, 누구의 사랑도 받을 수 없을 것 같고 그래서 더 이상 스스로 여자라 부를 수조차 없을 것 같던 중년 여성이 매력적인 젊은 남성이 '사랑'을 말하자 그에게 주체할 수 없이 빠져들어 모든 걸 내어주지만 결국 현실은 차갑더라, 뭐 이런 이야기. 여성이 주인공이어도 결코 드문 이야기는 아닐 뿐더러 주인공을 중년 남성으로 바꾼다면 훨씬 더 뻔하고 흔하고 그 역사도 더 깊을 그런 이야기.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이야기를 단지 그런 수준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영화의 첫 숏은 범퍼카에 앉아 있는 다운증후군 환자들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숏이다. 그들이 한참 범퍼카를 즐기는 모습을 각각의 클로즈업숏으로 담아내던 영화는, 이 행복한 순간을 멀찍이서 이들을 지켜보던 주인공 테레사의 롱숏으로 이 씬을 끝맺는다. 완벽한 타자화의 순간.

 

  이와 유사한 테레사의 태도는 그녀가 케냐로 가서도 이어진다. 호텔에 도착한 백인 여성인 그녀는 마치 흑인의 손이 닿았을 그곳이 불결하다는 듯 곳곳을 닦아대는가 하면, 여기저기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케냐라는 공간과 그곳의 모든 것들을 자신과 분리시켜 타자화한다. 해변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백인 관광객들과 그들을 바라보며 물건을 팔 준비를 하는 케냐의 흑인들을 분리하고 있는 끈과 경비인은 그러한 타자화의 시선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그녀는 남창을 구하듯 케냐의 젊은 남성과 만나 섹스를 하려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포기하지만, 또다른 케냐의 젊은이가 그에게 조금 특별한 호의를 보이고 '사랑'을 말하자 그 벽은 너무 쉽게 허물어진다. 그녀는 순수하게 사랑에 빠진 양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그렇기에 뒤늦게 밝혀지는 사실에 더욱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나 정말 그녀가 그토록 '순수'하게 '사랑'을 했던가?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만나는 과정은 결국 남창을 구하는 과정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 또한 그녀는 마치 장난감 혹은 성노예를 대하듯 남성에게 일일이 애무법을 가르치며 원하는 대로 섹스를 끌어간다. 남자의 사연 앞에 돈을 쓸 때도 그녀는 남자와의 섹스 이후, 혹은 학교의 아이들이 재롱 떨듯 노래를 불러준 이후 마치 적선하듯 지갑을 여는 식이다. 그녀가 남자가 자는 동안 그의 얼굴과 성기를 찍는 행위 역시 그녀가 케냐의 풍경들에 카메라를 들이대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남자가 그녀에게 사랑을 말했지만 실상 그녀를 돈 대주는 사람 정도로 여긴 것처럼, 그녀도 사랑을 말했지만 실상 그녀 역시 그녀가 원하는 감정을 불러 일으켜주고 여성으로서 다시금 자기 존재 증명을 하도록 도와줄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러한 타자화의 시선은 진정한 사랑과 공존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그녀는 딸을 데리고 (친척인지 친구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 또 다른 여성의 집에 간다. 이 여성의 공동체는 여성성을 차츰 잃어간다고 스스로 느끼는 중년 여성 테레사가 그들을 타자화하려 드는 남성성으로부터 도피해 온 곳처럼 보인다. 그곳에 여성 공동체란 요새를 지은 뒤에야 그녀는 맘놓고 자신을 다시 여성으로 증명해 줄 기회의 땅 케냐로 향한 것이며, 케냐에서 그녀는 다시금 '백인 여성' 공동체를 마치 초소처럼 마련해 두고 매일 백인과 케냐 흑인 사이를 막아둔 끈을 넘어 흑인들 사이를 헤집으며 자신을 여성으로서 증명해 줄 타자화의 대상으로 적합한 이를 물색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테레사의 생일날, 그 백인 여성 집단이 한 흑인 남성을 노리개 삼고 누가 그를 먼저 발기시키느냐 내기를 걸어 자신들의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테스트하려 드는 데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인다. 

 

  아직 여성의 인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을 때, 백인 여성들이 남성들의 타자화의 시선 아래서 스스로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가장 먼저 가장 손쉽게 차용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흑인 노예를 타자화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 속에서 테레사를 비롯한 백인 여성들의 행위가 바로 이 연장선 상에 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여성적인 매력을 시험하려 한다는 점에서, 백인 남성들에 의해 타자화된 여성성으로부터 사실상 제대로 벗어나지도 못하고(따라서 이들이 남성성에 맞서 세운 공동체는 결국 허상이다. 그녀가 딸에게 연거푸 메시지를 남기지만 연락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이의 증명이리라.) 이를 그대로 내재화한 채 바로 그 타자화된 여성성을 흑인들을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증명받으려 하는 셈이기에 더욱 그 문제가 심각하다.

 

  또 한 명의 남성과 섹스를 하려다 실패한 테레사는 끝내 여성으로서 자기 증명에 실패했단 자괴감에 눈물을 터뜨린다. 이제 카메라는 백인과 흑인을 나누던 경비인의 모습을, 백인에게 타자화된 케냐의 풍경들을 차차 담더니, 롱숏으로 일출을 배경으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걸어가는 테레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가 프레임을 벗어날 즈음 이번에는 케냐의 흑인 남성들이 덤블링을 하며 우측에서 좌측으로 지나간다. 마지막까지 흑인들은 결국 타자로 남는 셈이다.

 

  영화의 크레딧이 다 오른 뒤엔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스트라이프 옷을 입은 흑인 밴드의 모습이 담긴 쿠키가 나온다.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이 장면은, 우리 역시 그들을 타자화하는 시선의 또다른 주체가 아니냐는 질문과 함께 영화를 다시 한 번 끝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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