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인간의 뇌를 치료하기 위한 약을 개발하느라 실험하다가 일이 잘못 풀려서 침팬지가 똑똑해 지고, 침팬지는 고난과 역경 끝에 우리에 갇힌 신세를 벗어 나는 큰 소란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야기 구석구석에는 이미 고전 명작으로 자리 잡은 원판 "혹성탈출" 영화로 이어지는 요소들이 뿌려져 있기도 합니다.


(더 똑똑해지는 침팬지)

이 영화는 그 절정 장면만 놓고 보면, 괴물이 습격해서 도시를 어지럽힌다는 고전 SF 물의 형태 입니다. 도시에 이렇게저렇게 난리가 나기도 하거니와 괴물에 해당하는 침팬지의 모습을 묘사할 때 놀래키는 공포 영화의 수법을 쓰는 면면이 많다는 면도 딱 그렇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잡다한 SF 영화들을 많이도 만들던 50년대에 이런 영화들은 꽤 많았지 싶습니다. 이 영화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동물들이 이상하게 변해서 사람들을 공격하는 이야기도 흔하다고 생각 합니다. 개미, 도마뱀, 전갈 등등이 쳐들어 오는 영화들은 꽤 유명하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방사능 오염으로 크기가 거대화 되는 사례가 유난히 많기는 했습니다만, 충분히 이 영화도 거기에서 멀지 않은 부류에 놓을 만하다고 생각 합니다.

이런 부분은 볼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전체 영화에서 보면 그렇게 양을 많이 차지 하고 있지는 않고, 인류 멸망을 다루는 이 시리즈의 규모에 비하면 도시 하나에 소동을 일으키는 정도라 아주 어마어마한 장면은 없습니다. 이런 점은 실망이라면 실망거리이기도 합니다만, 그렇지만 그래도 그 정도 규모 안에서 재미 났습니다. 동물들의 독특한 성질과 뛰어난 능력을 생동감 있게 잘 보여주기도 하거니와, 떼거리들을 묘사할 때는 정말 실제 동물처럼 보이는 때가 많은 시각 표현 자체가 출중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무엇 보다도 이런 식의 "대역습" 영화 답게 도시의 명승지가 공격을 당하는 데, 그 명승지의 특성을 아주 잘 살리고 있어 보였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여러 영화에서 많이도 나오는 곳입니다만, 이 영화만큼 금문교의 여러가지 특성을 영화 속 이야기에 잘 살린 경우도 없겠다 싶을 만큼 재미있고 보기 좋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가지 장면도 창을 던지는 침팬지들을 보여주는 모습처럼 예상치 못한 소재와 기대할 만한 싸움이 잘 섞여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이 부분은 속도가 훨씬 빨라서 그렇지 유명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감독작 "새"에서 정글짐에 새가 모여드는 섬뜩한 장면과 흡사해 보일 정도 였습니다.


(침팬지가 덤비다)

동물들이 습격하는 대목에서는 다른 이야기 거리들과 맞아 들게 하기 위해 수를 쓴 부분도 잘 되어 있었습니다. 좋은 예로 "킹콩" 영화들이 앞서서 잘 보여준 바 있던, 인간을 공격하는 괴물이지만 나름대로 불쌍하기도 한 모습을 이 영화는 썩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 합니다. 이렇게 꾸민 덕분에 이런 부류의 영화에서 중심 구경거리가 되는 괴물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를 더 많이 투입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동물들의 동작과 싸움이 더 진지하고 처절해 보이기도 하게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다리 위에서 홀연 말이 달려 오는 장면처럼 그 심상 자체가 그저 시적인 부분도 무척 재밌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이 영화는 이렇게 본격적으로 동물들이 인간을 습격하는 괴물이 되어 난동을 부리는 절정 장면은 영화가 상당히 많이 진행된 이후에야 터져 나오는 장면 입니다. 그 부분에 그다지 비중을 많이 싣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이야기 거리 하나하나를 넉넉히 부려 놓았기에 이런 이야기도 아주 부족한 수준은 아닙니다만, 전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썩 크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대신에 이 영화는 동물이 고난과 역경을 겪는 이야기로 중반을 채우고 있습니다. 동물의 심성과 시련을 어느 정도 의인화된 시점으로 잡아 내면서, 동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의 세계에 떨어져서 사료를 먹고 목줄에 묶여 다니며 사는 생활을 소재로 삼는 겁니다. 애니매이션 영화에서는 정말 많이 나왔던 소재일 겁니다. 동물원에서 탈출하기도 하고, 탈출한 동물들이 동물원으로 돌아가려고 하기도 하면서 가지 각색으로 여러가지 방식으로 써먹었던 내용들이 기억 납니다.

이 영화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어두운 어조로 엮어 내고, 표정이 더럽고 주먹질을 잘하는 동물을 써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동물을 표현한 특수 효과가 상당히 자연스럽기는 했습니다만, 이 부분의 이야기는 특별히 대단한 대목 없이 그러저러한 정형화된 틀을 무난히 따라간다는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이야기 뼈대는 살짝살짝 어긋나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 이야기 속 침팬지 주인공인 시저의 무용담은 이런 겁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구원하는 지도자라면서 무리를 휘어잡고 몰아 대는 위엄있고 무서운 위대한 단 한 명의 수령이 나타나 영웅적으로 혼자 다 설쳐서 다 붙잡아 패버리고 새 세상으로 인도하니까 모두들 목숨바쳐 충성하며 칭송하고 모신다는 겁니다. 이런 것을 예찬하는 연출은 옛 신화와 같은 면이 멋질 때도 있지만 반대로 현실적인 다채로운 맛은 확 죽는 보기 좋잖은 면도 숨어 있다고 생각 합니다.

장면 장면에는 볼 구석이 더 많기는 합니다. 창문 그림을 그리는 부분이나, 영화의 중대한 전환점을 표시하며 주인공 침팬지가 소리를 내는 장면 등등은 감흥이 크게 연출되어 있기도 합니다. 시각적 심상, 청각적 심상을 와닿게 들이 밀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 부분 부분의 힘을 실어 주는 데 그쳤다고 생각 합니다. 이런 중반부 까지의 이야기를 약간 더 간명하게 해 나가고, 이야기의 절정 이후인 소란 장면을 좀 더 강화해 나가는 것도 상상해 봤습니다. 그러면 영화가 더 흔해 보이기는 했겠습니다만 차라리 더 재밌었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물론 그렇게 단순하게 가는 대신에 주인공 침팬지가 겪는 시련을 조금 더 특색있고 박진감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줄거리를 만들어 낸다면야 그보다 더 좋겠습니다만.


(몽테 크리스토 백작 신세)

그렇습니다만, 또 지금 나온 모양대로만 봐도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이런저런 표현 수법들은 썩 볼만한 부분입니다. 특히 이 영화는 말 못하는 침팬지가 주인공으로 나오기 때문에, 대사로 구구하게 사연을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런 부분에서는 그저 관객이 등장인물의 마음이 되어 눈으로 보고 귀로 느끼면서 짐작하여 이야기를 알 수 있도록 보여 줘야 할 겁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영화관 화면을 보는 관객은 좀 더 내용을 와닿게 느끼고 더 영화 속 세상에 빠져들기 쉽게 될 겁니다. 이 영화는 이렇게 말 없이 보여줘서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부분들이 잘 되어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영화에서 어떻게 주인공 침팬지가 동료 침팬지들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가에 대한 부분을 보면, 한 마디 설명도 대사도 없이, 침팬지가 뛰어서 어딘가로 가는 장면, 냉장고를 여는 장면, 우리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 등등을 적절한 음악과 함께 차례로 이어서 보여주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관객은 침팬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수법을 쓰는 지, 이런 일이 벌어져서 앞으로는 어떤 사건이 벌어질 지 모두 환하게 직접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고도 관객이 직접 침팬지의 마음 속을 느끼게 하는 맛은 이야기에 빠져 들게 하기에 더없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 외에도 피아노 소리를 이용하는 대목과 같이 복선이나 전조를 드리우는 소재 활용을 각본 틈틈히 세밀하게 잘 챙긴 것도 뛰어난 편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이야기 전체를 부드럽고 응집력 있게 몰고 가는 데 힘이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결국 싸움 구경하러 그냥 괜히 따라온 것처럼 보일 뿐인 사람들)

이야기를 절정까지 이끌고 가는 침팬지의 수난과 모험은 적당하게 갖춰져 있고, 절정 이후에 침팬지들이 난동을 부리는 부분도 볼만한 영화였다고 생각 합니다.

두 가지 이야기 거리 사이에 장단점을 이야기 했습니다만, 침팬지가 수난을 겪는 부분에서 정말로 크게 부실했던 부분은 인간 주인공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침팬지 쪽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말없이 보여줘서 느끼게 하면서, 이 인간 주인공의 이야기는 대충 풀어 나가다가 좀 막힌다 싶으면 확 해설을 깔아서 "사실은 이렇게 되었다"고 배경에 깔리는 설명 대사로 틀어 막고 대충 때워 뛰어 넘기기도 합니다.

그래도 뇌를 치료하는 약을 개발하는 인간 주인공의 사연은 뭐, 갈등 구조 상으로 아주 치명적인 문제는 없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인간 주인공이 "착한 사람"으로 영화에 나오고 있다는 점은 꽤 큰 문제 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인간은 따지고 보면 모든 문제의 근본이고, 수많은 불법 행위와 가족 이기주의에 묻힌 악행을 줄줄이 저지른 인물 입니다. 결국에는 이 놈의 각종 관리부실 때문에 인류가 멸망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영화에서는 다만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돈만 아는 제약회사의 사악함에 휘둘리는 불쌍한 과학자"스럽게 연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착한 사람" 같은 태도로 영화 속 이야기들 마다에 엮여 있습니다. 그 탓에 이야기가 좀 더 선명하고 힘 있는 길로 애초에 발을 딛지 못했다고 생각 합니다. 이를테면 금문교에서 사단이 벌어지고 있을 때 이 주인공이 비장하게 현장으로 뛰어드는 장면이 나오는데 참 할 일 없어 보이는 데다가, 대책도 없어 보이고 심지어 돌아보면 그러고 나서도 별 행동도 안합니다.


그 밖에...

이 영화에서는 제약회사 사장 같은 사람이 악당처럼 연출되어 등장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가만 보면 이 인간은 그냥 성실한 임원으로 별 나쁜 짓 한게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젊은 과학자를 잘 알아 보고 지원해 주고 망한 뒤에도 챙겨 주며 기회도 주고 말도 잘 나누는 것을 보면, 좋은 면이 많은 사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악당 취급 받아 험한 꼴 당하는 것을 보면 꽤 불쌍 합니다. 인간 인물들 중에 그나마 악당 답게 활약하는 인간은 동물 보호소의 악당 사육사 한 사람 정도인데, 또 이놈은 혐오스러운 짓만 그저 멍청하게 해대는 놈이라 잘 하긴 했어도 이야기를 풍부하게 하는 쪽으로는 별 도움이 못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으로는 주인공 옆집 아저씨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야기 초반에 침팬지의 원래 서식지를 보여주면서 제약회사로 넘어가는 장면들은 약을 개발하기 위해 동물실험을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이야기의 정석을 보여 줍니다.

원판 "혹성탈출"에서 극히 유명한 연기를 보여 주었던 당시의 주인공 배우 찰톤 헤스톤은 노인성 치매가 원인이 되어 병사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또 여러 생각이 드는 면이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SF물의 유명한 원판 영화와 그 주인공 배우 찰톤 헤스톤에 대해 충직하게 존경의 뜻을 보여 주는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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