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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아리랑>을 알게된 건 인터넷 뉴스 기사였다. 잠적한 김기덕이 제자 장훈을 겨냥한 영화를 하나 만들었는데, 영화속에서 '죽이러간다'고 외친다는 기사였다. 멀리 구로까지 찾아가 이 영화를 본 건, 불구경보다 재밌다는 싸움구경을 위해서였음을 밝힌다. 감독이 무엇때문에 누구를 죽이고 싶어졌는지 궁금했다. (사실 김감독은 영화속에서 자기 자신을 죽이러 간다.) 영화 속 그는 종종 화를 내긴 하지만, 더 자주 눈물범벅이 되도록 운다. 난 왠지 그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면서, 자꾸 콧망울이 시큰거렸다. 

김기덕은 자신의 잠적 계기에 대해 소상히 밝힌다. '비몽' 촬영 당시 여배우가 (아마도) 목숨을 잃을 뻔 했는데, 그는 자신의 이기적 예술행위에 잠재된 위험성에 공포를 느꼈다고 말한다. 자기 곁을 찾아와 영화를 배운 이들이 자본주의의 유혹으로 떠나간 것 역시 고백한다. 6.25에 참전한 미군 병사에 대한 이야기를 찍고 싶은데, 여러가지로 만들 수 없는 상황임이 안타깝다고 전한다. 

영화속에는 '묻는 김기덕'과 '답하는 김기덕'이 나오는데, 자꾸 눈물짓고, 술을 들이키는 후자에게 전자는 쏘아붙인다. 사람들이 니 영화를 기다리는데, 왜 이렇게 살고 있냐고. 니가 무슨 '개'냐고. 인생이 다 그런건데, 왜 단호하고 명백하게 살지 못하느냐고. 니 영화속에 등장한 주인공들이 널 부끄럽게 생각할꺼라고. 김기덕은 3년째 산골 오두막에 쳐박혀사는 본인이 많이도 원망스러웠나보다. 더 모질고 강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다며 스스로를 꾸짖는다.

감독은 어떤 모욕감이 어느 순간 번개처럼 찾아와 본인을 괴롭힌다고 토로한다. 그리고는 산골에서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에 대해 담담히 대답한다. "자신의 삶을 압축하면 하나의 커다란 외로움이다." "'수취인불명'에 등장하는 혼혈아는 국민학교 시절 유일한 친구였다." "영화를 찍으며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주는 게 참 행복했다." "이제와 돌아보면, 인간의 삶은 극히 미미한데도, 그것은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승패를 가리는 치열한 구조속에 놓이게한다." "인생은 자학과 피학과 가학이다." 

영화는 김기덕의 예술론, 인생관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의 하루를 상세히 조명한다. 기인적 풍모를 갖춘 예술인의 일상치고는 생각보다 평범했지만, 의외로 재밌는 구석도 많았다. 그는 오두막 속 텐트에 살면서, 난로에 밤, 호박, 고등어를 삶아먹고, 명태찢어 고추장 발라먹고, 고양이 밥주고, 흙파서 똥누고, 소주먹고, 머리빗고, 노래한다. 기억에 남는 건, 그가 직접 만든 에스프레소 머신이다. 유독 손재주에 능하고, 자립심 강하던 그의 영화속 케릭터는 감독 자신의 모습이었음을 알았다.  

영화 중반부터 그는 총을 하나 만들기 시작한다. 술에 취해 눈이 벌게진 채로 관객을 향해 "내가 지금 죽이러간다"고 내뱉더니, 총알 세발을 장전해 길을 나선다. 어느 멋드러진 주상복합에서 '탕', 허름한 단란주점에서 '탕', 그리고 또 어딘가에서 '탕'. 결국은 집에 돌아와서 마지막으로 '탕'. 역시 김기덕이다, 하면서 난 무릎을 쳤다. 그렇게 영화는 잠시나마 관객을 오싹하게 긴장시킨다. 

김기덕은 애타게 예전의 바쁜 일상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밝히는 자신의 꿈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각각의 나라에서 영화 한편씩 만들며 사는 것이라고 한다. 영화 말미에는 전에 그가 찍었던 영화들의 포스터가 한장씩 스쳐가는데, 마지막에 현장에 있는 그의 사진이 한장 나온다. 그가 들고있는 '비몽' 대본 뒤켠에는 빨간 글씨로 '여기서 머물지 말고 더 나가자'라는 글귀가 선명히 적혀있다. 그건 일종의 예고였는지, 김기덕은 최근 '아멘'이라는 영화를 들고 나왔다. 

영화는 복귀에 앞서 자신의 방황을 갈무리 하고 싶은 감독의 고백록에 가깝다. 무엇보다 자꾸 호기심을 일게끔하는 김기덕이라는 인간에 대해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영화였기에 좋았다. 영화속에선 누군가 몇번이나 그의 집 문을 두드린다. 자꾸 김기덕을 문밖으로 나오게하던 그 똑똑 소리는 그의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은유하는 것으로 보였다. 

영화의 마무리는 칸 영화제 시상식장이다. '아리랑'으로 '주목할만한 시선상'을 수상한 김감독은 시상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큰소리로 '아리랑'을 노래한다. 영화속에서 난 오랜만에 어른의 눈물을 보았는데, 이 영화를 통해 그는 다시 웃고 있었다. 세상이 주는 실망과 피로를 물리치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그의 선택을 응원하고 싶다. 그가 더는 같은 문제로 힘들지 않기를, 노래하던 그 모습처럼 밝고 편안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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